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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자료 아카이브

[백남준] 88이후 이정성 테크니션과 협업하다

<백남준 관련자료 이정성 테크니션과 대담내용과 백남준 아키이브>

 

 

메가톤 메트릭스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워싱턴 국립미술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에 소장된 Megatron/Matrix(전자모태) 여기에 홍길동 이야기도 나온다

 

백남준 선생 건강이 더 좋았더라면 우리가 마포 쪽 한강변에 대형 모니터 작품(메가톤 메트릭스)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그러나 선생님의 최종 목표는 마포 쪽 한강변에 대형 모니터로 설치해서 여의도 쪽에서 감상할 수 있게 설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 뉴저지 쪽에 설치해서 맨해튼 쪽에서 감상 하게 하는 게 목표이였으나건강을 돌보지 않는 선생님의 비디오 편집 습관으로 인하여 호암 상 수상 차 서울에 오셨다가 뉴욕으로 귀환 직후 쓰러 지시여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꿈으로 끝났습니다 -이정성

 

"나는 선생님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고 선생님 작품 중에서 작품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고 고 난도의 전자 장비가 포함된 대표적인 두 작품의 경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경우를 참고하면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도 장기 보존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우선 이 작품은 선생님과 제가 여러 해 동안 의논하고 토론하면서 선생님이 만들고 싶어 하시는 새로운 작품의 개념을 숙지 해가면서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수 있나 밤잠을 설치면서 좋은 방안을 궁리하고 1993년 겨울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선생님 전시 오프닝 파티도 대충하고 택시를 타고 찾아 간 곳이 몽파르나스에 한 카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QHrw9Nr0jc

이정성 테크니션은 백남준의 이 작품을 매우 중시한다, 아래는 이정성 선생의 이 작품에 대해서 직접 쓴 글이다

 

메가톤 메트릭스

 

"나는 선생님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고 선생님 작품 중에서 작품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고 고 난도의 전자 장비가 포함된 대표적인 두 작품의 경우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경우를 참고하면 선생님의 다른 작품도 장기 보존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우선 이 작품은 선생님과 제가 여러 해 동안 의논하고 토론하면서 선생님이 만들고 싶어 하시는 새로운 작품의 개념을 숙지 해가면서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수 있나 밤잠을 설치면서 좋은 방안을 궁리하고 1993년 겨울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선생님 전시 오프닝 파티도 대충하고 택시를 타고 찾아 간 곳이 몽파르나스에 한 카페였다.웨이터에게 두둑한 선불 팁을 주고 전망 좋은 자리를 어렵게 차지하고 작품 구상에 몰두 한 적도 있다 그런 우여곡절 속에 작품을 제작 하였는데 원래의 구상에 충실하게 제작 하였으나 그 당시 컴퓨터 사양이 다양하게 변환 하는 영상을 구현하는데 무리가 있었다.그 후로 한 번의 시행착오를 발판으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서 드디어 Megatron이 탄생하였다. 선생님이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150대의 모니터에 작가가 원하는 무슨 형상이든 구현이 가능하고 그 형상 속에 작가가 원하는 어떤 소프트웨어라도 7개의 Channel로 표출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처음 선생님이 소프트웨어를 선택할 때 1, 탈것(자동차. 마차, 자전거 등) 2, 날 것(비행기, 새 등) 3, 자연(구름, 바다 등) 이런 종류의 영상이 포함된 Disk를 준비 해 오셔서 애니메이션의 내부에 어떤 영상이 좋을지를 화면을 보시면서 선택을 하셨고 애니메이션에 OECD 국가의 국기를 중간 중간에 넣어서 유럽전시에 대비하셨다.이 작품의 1호 작품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전시한 후 삼성전자의 주선으로 특허등록 출원을 하였으나 복잡한 서류준비와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발명특허가 없어도 작품을 제작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하시며 그만두자고 하셔서 신청서류를 취하 한일도 있다.그러나 선생님의 최종 목표는 마포 쪽 한강변에 대형 모니터로 설치해서 여의도 쪽에서 감상할 수 있게 설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 뉴저지 쪽에 설치해서 맨해튼 쪽에서 감상 하게 하는 게 목표 이였으나 건강을 돌보지 않는 선생님의 비디오 편집 습관으로 인하여 호암 상 수상 차 서울에 오셨다가 뉴욕으로 귀환 직후 쓰러 지시여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꿈으로 끝났다.선생님은 그 후에도 간간히 이 계획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 하시곤 하셨습니다. 작품이 제작된 경위를 소개해 드렸다. 오늘의 목적인 작품을 어떤 방법으로 오래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나 어떤 방법이 제일 좋은 방안인가 하는 게 중요하다" -이정성

 

이정선 테크니션 1988년 다다익선 작업을 할 때 백남준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백남준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한국에는 다다익선이 있고 미국에는 전자초고속도로(미국지도)가 있다 미국에서 아래 작품이 고장이 나면 그냥 둘 리가 없겠죠

Nam June Paik has been called the father of video art. Many of his works combine video, music, and performance. He has been around since he early 60’s pushing the limits on technology and art. He is also said to have coined the term “electronic super highway” in reference to telecommunications; he went on to make a human sized robot that could walk, and to build a garden consisting mostly of televisions. He made a scale map of the USA out of masses of TV monitors and neon, that according to the Smithsonian exhibition text “proposes that electronic media [provides] us with what we used to leave home to discover”.

 

미국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백남준 작품 백남준은 이 작품을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작품명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 인터넷) [미국전역]

 

백남준 핵심어: 신통(도통)의 세계 즉 신(神)도 통하는 세상, 천지인이 하나로 통하는 세상을 염원하다] Nam June Paik….don’t get lost on the superhighway 백남준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한국에는 다다익선이 있고 미국에는 전자초고속도로(미국지도)가 있다 미국에서 아래 작품이 고장이 나면 그냥 둘 리가 없겠죠

Nam June Paik has been called the father of video art. Many of his works combine video, music, and performance. He has been around since he early 60’s pushing the limits on technology and art. He is also said to have coined the term “electronic super highway” in reference to telecommunications; he went on to make a human sized robot that could walk, and to build a garden consisting mostly of televisions. He made a scale map of the USA out of masses of TV monitors and neon, that according to the Smithsonian exhibition text “proposes that electronic media [provides] us with what we used to leave home to discover”.

Nam June Paik,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Hawaii (detail), 1995, fifty-one-channel video installation (including one closed-circuit television feed), custom electronics, neon lighting, steel and wood; color, sound,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artist.

 

 

이정성대형

이정성 테크니션 뉴욕에 가서 당시 최고인기상품이었던 소니 오존 노트북 컴퓨터를 사고 나서 백남준에게 보여줬더니 이렇게 사인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또한 특별한 면이 있다 바로 이정성 대형(大兄)이라고 높인 말을 사용한 것이다. 기술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가 싶다

 

백남준 선생이 이정선 테크니션의 손자를 위해 그린 낙서화

 

이정성 선생의 에피소드 하나 내가 손자가 생겼을 때 마침 뉴욕에 가게 되었고 그래서 "선생님 손자가 생겼어요" 했더니 "야하!"하면서 손자에게 보내는 그림을 그려주셨단다 1999년작. 이 작품이 이정성 선생 사무실에 걸려 있는 것을 봤다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신다는 의미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백남준은 한글로 사인을 할 때 반드시 '백남쥰'이라고 적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백남준이라는 사인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가짜이다

 

백남준 아파트 뉴욕 맨해튼 소호지구 머서 스트리트 5층 110번지 파사드 110 Mercer street Soho area Manhattan NY Nam June Paik's studio 처음 이곳은 땅값이 싼 허름한 곳이었으나 후에 예술가 촌이 되면서 집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그 안에서 이정성 테크니션 백남준과 함께 한 사진 당시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백남준 집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식품점 이렇게 서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 코너도 있다 Italy is Eataly(이탈리아는 맛있게 잘 먹는 나라)라는 재미있는 조어도 인상적이다 이탈리아 음식은 서구에서 최고 인기죠 이정성 테크니션 백남준 선생 자택에서 포즈를 취하다.

 

[이정성의 백남준에 대한 증언] 한국 사람이 제일 잘 알면서 제일 모르는 게 백남준이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잘 모른다. 멜빵을 매고 여기에 물병 달고 다니면서 엉성하게 사는 것 같지만 머리에선 컴퓨터가 돌아가고 있다.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 가하면 독일 뒤셀도르프 전시에 가기 전에 퀸스(?)창고(스토리지 storage)에 여럿이 간 적이 있다

여기 모니터 등 기구의 숫자를 세어 뒤셀도르프에 가져가도록 실어라고 하자 백남준 조수인 블레어가 우리 모니터 재고가 다 떨어졌다고 하니까 백남준은 그거 53개가 있다 14인치는 64개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직접 확인을 해 봤더니 그 창고에 정확하게 그 숫자만큼 있었다 백남준은 TV를 300대 샀는데 어디에 몇 개를 쓰고 또 어디에 몇 개를 쓴 것은 정확하게 기억하였다 그만큼 철저한 분이다 -이정성

백남준 선생 이정성 테크니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럽은 인종차별이 심하니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폼 잡고 가장 비싼 음식을 시키고 보이에게 팁도 많이 주면 절대 무시하지 않고 결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식사비는 늘 충분히 주었단다. 그리고 가장 비싼 음식은 서양음식이라도 맛이 좋다는 정보와 함께 말이다 이 말은 거지패션을 하고 다니는 백남준도 많이 당했다는 소리다.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백남준 회고전을 앞두고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백남준 회고전을 앞두고 뉴욕 백남준 아파트 근처 소호에서 작품 전시구상과 전시방식 등을 논의할 때 찍은 사진 왼쪽으로부터 갤러리 현대 대표 도형태 그리고 테크니션 이정성 그리고 미국의 유명작가이자 레어저-아트 설치 전문가인 '노만 발라드(Norman Ballard)'가 보인다. 발라드는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백남준 선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당시 백남준은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당시에 우리나라 갤러리 중 그래도 위상을 갖춘 유일한 상업갤러리가 '갤러리 현대'였기 때문에 백남준 작품에 두루 참여했고 지원하기도 했다. 이정성 선생이 나에게 공개한 사진이다.

 

 
 

 

[1982년과 2015년 33년의 차이] 82년 비디오 피라미드는 88년에 다다익선이 된다 백남준에게 TV는 달이다 즉 여성이다 백남준은 음력주의자다

이정선 테크니션의 백남준 작품 설치작업 경력 *사진저작권:이정성

 

1988년 : The more the better 다다익선 설치(국립현대미술관)

 

1989년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Image World(New York)

1990년 : St Gallen Museum(Swiss) <>더 보기<>

 

 

<세기말Ⅱ> 201개의 모니터로 된 4채널 비디오 설치, 1220×327×152cm, 1989 뉴욕 휘트니미술관

위 작품은 이정성 테크니션이 다다익선을 완성한 후 1년이 지나 뉴욕 휘트니미술관에 설치한 작품이다 백남준은 1984년 굿모닝미스터오웰을 발표하면서 21세기는 오늘부터 시작이라고 했는데 1989년에 이미 남보다 빠르게 세기말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 스케일도 정말 대단하다.

이정성 선생은 이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처음 뉴욕을 방문했다. 처음이라 통역을 붙였단다. 당시 미국에서의 반응은 대단했단다. 그리고 귀국했는데 백남준 선생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이제 외국생활 할만하지 하면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더니 느닷없이 이번에는 스위스에 가서 작품설치하고 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난데없이 혼자 스위스에 가서 작품을 설치하라니 당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독일에 백남준 테크니션인 요헨과 합류하기는 했단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그 작업 일주일 안에 끝나면 융프라우 구경하고 와 라는 주문이 떨어졌다고 그래서 TV80대를 개조해서 작업을 하는데 일주일안에 끝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TV분배기를 들고 취리히 공항에 도착해 정말 무겁고 큰 장비를 가지고 가야 했고 이정성선생을 공항에서 분배기 문제로 공항 측과 실랑이 붙었고 한판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독일어도 못하는 이정성선생은 공항직원들에게 한국어로 당당하게 호통을 치면서 뭔가 문제인가라고 따졌단다 간신히 공항을 빠져나왔는데 그를 기다리던 독일기술자 요헨이 그가 나오지 않자 초조해 할 수밖에 없었겠죠.

취리히 시내로 들어가 상트 갈렌이라는 곳에서 TV를 제조하고 미술관이 5시에 문을 닫는다며 재촉을 해 7시까지 시간영장허락을 받아 겨우 완성했다고 그래서 시간이 좀 남아 사실 관광도 했지만 이정성 선생이 이 일을 회상하면서 이것은 백남준선생이 내가 정말 그의 기술자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단다이정성선생은 100점으로 낙점이 되고 백남준의 영원한 테크니션이 된 것이다 백남준은 뉴욕에 있었을 뿐이다 독일어도못하는 이정성선생은 이런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을 완벽하게 완수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정성선생은 백남준과 제2의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1992년 작 뉴욕 체이스 뱅크 전자벽화(TV 429대 사용)다 이 작업을 뉴욕에서 할 때 이정성 테크니션의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뉴욕의 다다익선이다

 

뉴욕 체이스 뱅크 아마도 뉴욕 IT Center에서 설치한 작품이다. 센터가 들어가는 입구가 길다 좌우 벽이 있고 한쪽은 거울이 있고 한쪽은 아무것도 없고 여기에 전자벽화를 만들자는 요청이 와서 만들게 되었다 아침에 여기 많은 직원들이 출근하는 그 장면이 장관이다

이 작품은 프레임만 미국 칼 솔웨이(로봇 TV등 백남준 작품을 많이 제작한 갤러리)에 만들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만들어 보낸 것이다 비디오케이블도 모두 한국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문제였다. 비디오 작업 모니터 넣은 것만 허락하고 비디오케이블 세팅은 노조가 할 일이라며 강력하게 반박 주장을 했지만 아주 어렵사리 설득시켜 오픈날짜를 맞추기는 했다 나는 그들을 달래느라 고생했고 일단 기술적인 것만 개입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합의를 해 설치를 마쳤다. 귀국할 때는 정말 한숨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물감-붓으로 그리는 유화페인팅과 전자-붓으로 그리는 TV페인팅은 그 제작비에서 수백수천배가 차이가 난다. 점 하나 찍을 때 TV 한 대를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찔하다 세상에 이렇게 배짱 좋은 화가가 어디 있나. 도무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분야다 부잣집아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브란덴부르크 게이트 1992 당시 독일아트지에서 백남준이 세계2위라고 소개되는 시기였다 그해 작품인 브란덴부르크 게이트 만들 때 이정성선생의 에피소드는 아래와 같다.

 

도면을 보면 기본설치를 하고 그 위에 앤틱을 설치하게 되어 있다 지금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에 브란덴부르크 게이트가 있다(작년에 갔을 때 못 본 것 같다) 작품을 세팅하고 나서 쾰른 메세(아트페어)가 있었다.

당시 백남준은 세계2위라는 소식과 함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 많은 컬렉터가 몰려오는데 혹시 이 작품이 고장이 나면 안 되기에 당장 한국에서 비행기타고 쾰른에 가 혹시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보살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독일에 가서 루드비히 미술관에 가서 "나는 백남준 지시로 이 작품을 하루종일 살펴보겠다"고 하니 미술관 측 자신들은 신경을 안 쓰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이정성 선생 미술관이 보이는 가까운 카페에서 이 작품을 살폈다고 한다. 그 카페주인이 백남준 기술자라고 하니까 지정석을 정해주고 커피도 공짜로 주고 심지어 수다의 대상이 되어주고 그래서 친해졌다고 이정성 선생 그 독일친구가 오래 기억이 난다고.

백남준 선생 이정성 테크니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럽은 인종차별이 심하니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폼 잡고 가장 비싼 음식을 시키고 보이에게 팁도 많이 주면 절대 무시하지 않고 결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식사비는 늘 충분히 주었단다. 그리고 가장 비싼 음식은 서양음식이라도 맛이 좋다는 정보와 함께 말이다 이 말은 거지패션을 하고 다니는 백남준도 많이 당했다는 소리다.

[1992년 백남준이 여기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시티에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연습용으로 수준 높은 걸작을 만들어내다]

 

 

The city of Cincinnati is located near the southwestern tip of Ohio. Founded after the Revolutionary War, many historians termed it as the first purely American city in the US. It was a dominant financial and trading hub in the mid 19th century. Stunning architecture influenced by European styles earned it the nickname Paris of the West. Although the advent of railroads took away much of its sheen, the city remained a major cultural center, thanks to the huge number of German immigrants. Visiting Cincinnati means not only having a chance to enjoy its heritage sites but also several of its man-made attractions like architectural landmarks, public gardens, and museums.

 

 

백남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을 만들기 전에 연습용으로 1992년 미국 신시내티 작업실(갤러리)에서 여러 작품을 실험하며 획기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때가 백남준의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인지 모른다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다 화성 금성도 있지만 동대문도 있군요

1992년은 백남준이 황색재앙(공포)는 바로 나다를 선언한 30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부터 베니스 비에날레 작업준비에 들어갔다. 1992년 로마전시가 끝나자 백남준은 스텝들과 함께 베니스를 찾았다 왜냐하면 항상 현장을 봐야 보다. 좋은 전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관 방은 3대 본관은 한스하케가 쓰고 나머지 2개는 백남준이 썼다.

 

 

구조를 보고 나니 정말 세밀하게 만들지 않으면 사고가 나겠다는 생각이 아주 치밀하게 접근했다. 91년과 92년 뉴욕 홀리 솔리몬 전시가 베니스전시의 예비연습이 된 것도 사실이다. 

 

백남준 스텝과 늘 공동토론을 했다.1년 넘게 준비를 했지만 실제현장에서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세상에 없는 장비를 만들어 써야 했다. 신경을 많이 쓰고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까다로웠다.

 

 

사실 백남준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만든 것은 100%의 공로다 일종의 문화전쟁을 통해서 얻어내 최고의 성과다.2017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있는 백남준 작품 <다다익선>은 예술품이 아니라 설치물로 등록되어 있다(충격) 
이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10대 불가사의한 작품이다 TV가 1003대(개천절10월 3일에서 영감. 백남준 스키타이단군에 대한 오마주)가 들어갔다 그런 작품은 지구상에 없다 이것은 백남준 선생에 대한 오마주는 커녕 예의가 아니다 백남준이 지금 살아계셔서 과천관을 방문했을 때 뭐라고 하실까 사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만든 것은 100% 백남준의 공로다 일종의 문화전쟁을 통해서 얻어내 최고의 성과다.

그곳에 가 보니까 문화강대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국가관 한 가운데 한국관이 일본관과 함께 있었다 물론 화장실자리를 개조한 것이지만 가장 늦게 입주했지만 가장 좋은 자리가 한국관이었다. 이정성선생은 그곳을 자르디니에서 가장 노른자위 땅이라고 한다. 이것은 백남준의 세계적 명성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한국미술의 세계화의 둥지와 터전을 튼 분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대접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곳이 없으면 맨날 떠돌이처럼 전시할 곳 없어 얼마나 방황하며 치였겠는가

"나는 예술가와 기술자가 하나로 통합하는 날을 상상한다" - 백남준. 이런 정신이야말로 르네상스의 21세기적 해석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 예술가와 기술자의 만남이 가능할 때 진정한 총체예술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요셉 보이스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란 여기에 해당한다. 모든 기술자는 다 예술가이다. 

모든 기술자는 다 예술가이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백남준 작품을 설치하는 모습]

 

 

1993년 베니스 전시 준비과정에 어려운 돌발사건들 아래 백남준 키보다 5-10배가 되는 전자벽화를 만든다는 게 결코 쉬운일 아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전시장에 전기선이 없었을 때이다 일반작품에서 특별히 전기선이 필요가 없죠 밤에 몰래 벽을 뚫고 전기선을 깔아야 하는 고생까지도 다 안아야 했던 것이다 이정성선생의 증언]

 

 

 

진짜 밤을 며칠씩 설쳤다 TV는 에러가 나면 꺼지는데 그럴 때 저절로 다시 커지게 하는 설정을 해 놓아야 한다. TV 개발연구자의 노하우가 때로 필요한데 회사 측에서 주기도 하고 안 주기도 하고 거기에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게 주의해야 하기에 까다로운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전원을 멀티캡에 꽂지 말고 중간에 누전방지 트랜스를 하나 더 연결해 꽂으면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TV 1003대를 동시에 사용하다 보니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현상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식구가 1003명이 되는 가정에 비유한다면 그 많은 식구 중 문제아 많은 자식도 꼭 생기게 마련이다 -이정성 테크니션의 의견

 

 

최후의 만찬 등 거의 흔적만 남은 유화페인팅도 당연히 고쳐야 하듯 전자페인팅은 더더욱 당연히 고쳐야 한다. 만약에 백남준의 전자페인팅을 고칠 수 없다면 빌 비올라를 비롯한 전 세계 뉴미디어아트페인팅은 다 버려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이정성선생의 의견). 왜냐하면 그것은 5년 안에 다 고장이 날 것이고 부품이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깨워졌다는 면에서도 백남준은 선구자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자작품 설치준비 중 TV더미에 사이로 천진난만하게 큰 대자로 눕다]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작업 중인 백남준그러면서 말했다. "나는 아기 TV이고 TV도 장남감 나도 장난감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진을 보면 이 복잡한 선을 어떻게 연결해서 작품이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역시 전자기술에 대한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하겠죠. 그래서 천재인가 하긴 이 뒤에는 보이지 않게 이정성 테크니션이 있었다./[백남준은 카라얀처럼 폼 잡는 음악을 경멸했다 그래서 노이에 뮤직(신음악)을 창안하다] 아리아가 있는 오페라는 평범하다. 아리가 없는 오페라는 지루하다 카라얀은 너무 바쁘다. 칼라스는 너무 시끄럽다. 바그너는 너무 길다. 돈은 너무 귀하다 -백남준 로봇 오페라 1965

 

1995년 백남준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고인돌

 

[백남준의 테크니션은 국제적] 백남준 움직이는 전자음악페인팅을 관객이 실제로 볼 수 있도록 구현하는 전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많은 테크니션들: 독일과 유럽 담당 요헨 샤유어라커, 미국 비디오와 방송 및 컴퓨터 담당 폴 게린 작가, 미국 레이저 아트 담당 노만 발라드

 

 

[백남준관련기사] 

http://hankookilbo.com/v/4743dc62a0ad4c08bcf4ba31bd41932d

“비디오 아트  백남준 작품을 영원히”HANKOOKILBO.COM

“남준의 천재성이 빛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공동작업에 탁월했고, 비전을 현실로 실현해 줄 사람들을 가까이 뒀다는 것. 주변 이들에 대한 이런 신의와 우정이야말로 그가 가진 가장 훌륭한 재능이었죠. 이제 우리는 그의 업적을 지켜야 합니다.”(마크 파스팔 미국 신시내티대 교수) -기사 중에서

 

백남준과 미국 독일 한국 테크니션 그룹 화보 레이저 아티스트 및 레이저 테크니션인 노만 멋쟁이더라 그 옆에 독일 테크니션 요헨 샤유어라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 1부(위 사진) 국제심포지움 2부로 백남준 워크숍하는 모습(아래 사진) 아래 왼쪽부터 독일에서 조수를 한 요헨 샤유어라커(유럽담당),미국 신시내티에서 '백남준 공장' 작업한 마크 파스팔마크교수(TV공학), 폴 게린 작가(컴퓨터 선구자 비디오편집), 한국 아트마스터대표 이정성(전자공학), 백남준 레이저 작업에 협업한 노만 발라드(레이저아트의 대가)

 

 

폴 게린' 작가(비디오편집 오른쪽 1번째 사진) 이 사람은 미국 CIA와 싸우는 사람이라고 채식주의자이기도 하고 그는 비행기 기내식을 먹지 않는다고 혹시 독약이 들어있을까 싶어 그 정도로 미국 CIA와 라이벌 왜냐하면 그의 컴퓨터 실력이 미국 CIA 능가하기에(이정성선생의 증언) 
모든 기계는 고장이 나게 되어있고 특히 모든 전자기계는 반드시 고장이 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상식이다. 백남준도 그런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의 전자아트작품이 언제 어떻게든 업그레이드되기를 열망한 것이다. 그 한 예로 아래와 같은 백남준의 메모를 살펴볼 수 있다.

 

 

지난번 국제심포지엄으로 30년간 백남준 조수로 국제적 협조자로 일한 테크니션 5인이 다 모였다. 한국 '이정성' 아트마스터대표(전자공학), 미국 신시내티에서 '백남준 공장' 작업한 '마크 파스팔마크' 교수(TV공학), '폴 게린' 작가(비디오편집), 독일에서 조수였던 '요헨 샤유어라커'(유럽담당), 백남준 레이저 작업에 협업한 '노만 발라드'(레이저)가 그들이다.

 

 

백남준 움직이는 전자음악페인팅을 관객이 실제로 볼 수 있도록 구현하는 전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많은 테크니션들: 독일과 유럽 담당 요헨 샤유어라커, 미국 비디오와 방송 및 컴퓨터 담당 폴 게린 작가, 미국 레이저 아트 담당 노만 발라드 그리고 한국 및 독일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미국 일본과 터키(이스탄불 비엔날레) 등 전세계 담당 이정선 테크니션 그리고 미국 신시내티에서 '백남준 공장' 작업한 마크 파스팔마크교수(TV공학) 맨 왼쪽에는 중국 갤러리(?) 관장 *사진저작권: 디자인 하우스

뒤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서울랩소디는 백남준의 후기작품 메카트론(전자벽) 시리즈 작품 중 하나로 백남준은 여기서 다다익선에서 사용한 볼록한 모니터를 쓰지 않고 평평한 모니터를 사용했다 백남준의 다다익선 모니터를 꼭 볼록한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은 그런 면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당시에 그런 모니터밖에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교체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옹졸하다 백남준적이지 않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 1부(위 사진)에 이어 국제심포지움 2부가 열렸다. 백남준 워크숍하는 모습(아래 사진) 아래 왼쪽부터 독일에서 조수를 한 요헨 샤유어라커(유럽담당),미국 신시내티에서 '백남준 공장' 작업한 마크 파스팔마크교수(TV공학), 폴 게린 작가(컴퓨터 선구자 비디오편집), 한국 아트마스터대표 이정성(전자공학), 백남준 레이저 작업에 협업한 노만 발라드(레이저아트의 대가)

 

 

지난번 국제심포지엄으로 30년간 백남준 조수로 국제적 협조자로 일한 테크니션 5인이 다 모였다. 한국 '이정성' 아트마스터대표(전자공학), 미국 신시내티에서 '백남준 공장' 작업한 '마크 파스팔마크' 교수(TV공학), '폴 게린' 작가(비디오편집), 독일에서 조수였던 '요헨 샤유어라커'(유럽담당), 백남준 레이저 작업에 협업한 '노만 발라드'(레이저)가 그들이다.

 

미국 신시내티에서 '백남준 공장' 작업한 '마크 파스팔마크' 교수(TV공학) 백남준 회고전 감상

 

[쇼크]<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 백남준 작품 <다다익선>은 예술품이 아니라 설치물로 등록>

 

2006년 백남준 선생 서거 추모식 사진 오마이뉴스 권우성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만들면서 가정용(1인용)으로 만든 TV를 예술용으로 만들다 보니 무려 1003개의 TV를 동시다발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역시 백남준의 스케일을 읽어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누전의 위험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데 이것을 한전 누전 기준인 250K 이하로 만들려면 아주 간단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있는 백남준 작품 <다다익선>은 예술품이 아니라 설치물로 등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10대 불가사의한 작품이다. TV가 1003대(개천절10월 3일에서 영감. 백남준 스키타이단군에 대한 오마주)가 들어갔다.

10주기 맞아 ‘보존 대책’ 심포지엄 “작가 생전에 일부 작품 수정 허가 망가지고 있는 다다익선 등 복원을” 삶과 작품 기리는 전시회 등 잇달아 “남준의 천재성이 빛나는 그런 작품은 지구상에 없다 이것은 백남준 선생에 대한 오마주는커녕 예의가 아니다. 백남준이 지금 살아계셔서 과천관을 방문했을 때 뭐라고 하실까.

 

 

[무선통신은 곧 선의 정신이다]

백남준은 탈영토제국주의라는 용어도 사용했지만 그는 일체의 경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자였다 다시 말하면 분열과 장벽을 참지 못하는 평화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동양인으로서 서양과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했고 한반도인으로서 남북의 경계를 허물려고 했다 그는 도무지 벽을 보면 참지 못하는 그걸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다 부셔버리는 사람이었다 1984년 위성아트가 나오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전 세계 TV를 연결하면 다 통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서양의 미디어이론가 중에는 '키틀러'라는 유명한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유럽식 우파적 관점에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디지털 시대를 동양과 선과 샤머니즘과 결부시킴으로써 더 유연하고 융통성있고 독창적인 예술로 변화시켰다.

다시 말해 "무선통신은 곧 선의 정신"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말은 서양인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이다 기술에 대한 기술로 대응한다고 했는데 전자의 기술을 서양의 기술이고 후자의 기술은 바로 동양의 선과 샤머니즘일 것이다

백남준의 '비디오공동시장'이라는 개념은 그의 70년대 초기작품 TV코뮌(Commune)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을 바로 다중 커뮤니케이션을 향한 상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보와 지식을 자유롭게 접근법(Access)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아이폰이다 미국국립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핸하르트의 말이다

그리고 또 여기서 나온 것이 1인 미디어시대 비디오의 코뮌인 공동시장인 유튜브이고 또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온라인 집단지성인 위키페디아다 이런 것은 모든 백남준의 비디오공동시장 혹은 코뮌 개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백남준 아카이브 이정성 테크니션 보관

 

모든 기계는 고장이 나게 되어있고 특히 모든 전자기계는 반드시 고장이 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상식이다. 백남준도 그런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의 전자아트작품이 언제 어떻게든 업그레이드되기를 열망한 것이다. 그 한 예로 아래와 같은 백남준의 메모를 살펴볼 수 있다.

"1990년도에 많이 쓴 일제 QUASAR TV가 노화되었으므로 이번에 그것을 개량하기를 원합니다. QUASAR TV 8인치 대신에 삼성이나 LG나 동양TV나 13인치를 알맹이만 이용하면 원상보다 훨씬 개량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원작자의 의견이니 컬렉터 여러분의 물심양면 협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정성선생이 보관하고 있는 백남준 아카이브

 

백남준 아카이브 이정성 테크니션 보관

 

백남준은 1988년 다다익선을 만들 때부터 이 작품을 수리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수리비용 예비청구서를 냈지만 당신의 예산편성 상 힘들었단다. 백남준은 다다익선 애프터서비스에 대해서 당시 이 작품을 만든 이정성 테크니션에게 일체의 모든 수리를 허락한다는 위임장을 써 준 것이다

To whom it may concern 李正成(이정성) 씨에게 多多益善(다다익선: 정보사회는 지식·소통방식·유통구조·방송매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after service에 관한 전권을 일임한다. 백남준 미국 뉴욕에서 팩스(305-538-6445) 1992(?)/6/03 -이정성선생이 보관하고 있는 백남준 아카이브. 백남준은 이정성을 장난기로 'LEE정成' 이런 방식으로 쓰기도 하다

 

 

왼쪽 LCD(10인치), 오른쪽 브라운식(모니터 10인치) 


백남준의 다다익선 TV 모니터가 고장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작품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기에 백남준 당사자는 당연히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교체하라고 위임장을 써 주었지만 말이죠

왼쪽 것이 LCD(10인치)이고 오른쪽이 지금 작품에 쓰인 브라운식(모니터 10인치)다 비교해 보니 LCD는 무게가 과장해서 브라운 식의 100분의 1이다 속이 텅 비어 열받을 일이 없다 그리고 브라운식은 10인치프레임 안에 온갖 것들을 쓰셔집어 넣은 듯 내부가 복잡할 뿐만 아니라 여러 장치로 꽉 차 있다 그러니 당연히 열을 받는다 그래서 에어컨 가동한다. 게다가 마이컴이 부착되어 있기에 고장 나기가 더 쉽다. 이런 TV모니터가 여러 개 병렬식으로 연결하니 그만큼 문제가 많아질 확률이 추가로 높아지는 것이다 [고장난 브라운 TV를 1개만 따로 떼어 놓으면 다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단다]

그런데 이 2가지 모니터의 차이가 있다면 LCD 화면이 좀 평평하고 브라운 식은 화면이 볼록하다. LCD 화면이 더 화면이 선명하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 때문에도 브라운 식은 LCD방식으로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백남준은 후기 작품은 LCD방식을 사용했다 그 당시 브라운식을 쓴 것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브라운식을 주장하는 사람의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사실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개발인데 백남준은 사실 이런 것을 발명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그런 창조적 활동이 중요한데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하드웨어 껍데기 모습과 그 화면이 볼록하냐 평평하냐 이런 걸 가지고 따지는 일은 사실 너무나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다다익선 콘덴서(축전기)가 1가 뻥 터진 것으로 아는데 이정성 테크니션에 의하면 뻥 터진 것은 고치기 가장 쉬운 것이란다.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단다. 사실 고치기 힘든 것은 소리가 없는 경우라고 그리고 요즘에는 콘덴서 헤드에 3개의 금이 가 있어 터지기 전에 공기압력 혹은 열에서 나오는 김을 빼주는 역할을 하기 그런 고장은 거의 없단다. 아래 자료 사진을 보면 큰 것은 금이 없는데 작은 것은 머리 부분에 3개의 금이 그려져 있다 작지만 이것이 터지는 것을 방지해준단다 그 아래 크기가 작은 콘덴서도 마찬가지다

 

다다익선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정성 테크니션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만들면서 가정용(1인용)으로 만든 TV를 예술용으로 만들다 보니 무려 1003개의 TV를 동시다발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역시 백남준의 스케일을 읽어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누전의 위험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데 이것을 한전 누전 기준인 250K 이하로 만들려면 아주 간단하다 전원을 멀티캡에 꽂지 말고 중간에 누전방지 트랜스를 하나 더 연결해 꽂으면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TV 1003대를 동시에 사용하다 보니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현상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식구가 1003명이 되는 가정에 비유한다면 그 많은 식구 중 문제아 많은 자식도 꼭 생기게 마련이다 -이정성 테크니션의 의견

 

최후의 만찬 등 거의 흔적만 남은 유화페인팅도 당연히 고쳐야 하듯 전자페인팅은 더더욱 당연히 고쳐야 한다. 만약에 백남준의 전자페인팅을 고칠 수 없다면 빌 비올라를 비롯한 전세계 뉴미디어아트페인팅은 다 버려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이정성선생의 의견). 왜냐하면 그것은 5년 안에 다 고장이 날 것이고 부품이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깨워졌다는 면에서도 백남준은 선구자다

 

<쉬어가는 코너> [백남준과 임영균]

[임영균 사진이 1984년 뉴욕 타임스 첫날 기사에 실리다] 백남준의 ‘위성 쇼’를 커버 기사로 다룬 1984년 1월 1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린 백남준 사진 역시 임영균 작가의 작품이다

 

 

[백남준 뉴욕타임스 중 전문기자가 쓰는 과학 섹션을 가장 열심히 읽다]백남준 선생의 지적 해박함의 비결은 뉴욕타임스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는 것에서 온 것이다. 꼼꼼히 정독하고 특히 화요일 과학 섹션은 스크랩까지 하면 작업의 소재로 삼는다 - 임영균

 

 

사진가의 백남준에 대한 증언/"헝가리에 가봤어 우리말과 같은 것이 많이 있어 헝가리 사람들도 가슴을 가슴이라고 해 굿을 굿이라고 해 또한 한옥의 나무 냄새도 똑 같지 그러면서 '뉴욕 타임스'는 보는가? 매주 사이언스 섹션은 전문기자가 쓰지" - 백남준이 임연균을 만나서 한 말 "김원열 30년 전에 헝가리에서 전시할 때 민박주인집 아주머니가 자기들도 우랄알타이 몽고에서 건너온 민족이라고 하더군요. 어순도 똑같고 비슷한 말도 많고 판란드도 같은 몽고족이라고 하데요. 고추 먹고 마늘 먹고 거의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