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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

[제13회 백남준포럼] 그의 샤머니즘과 메타버스, 그리고 플럭서스 유동성 [제13회 백남준포럼(대표이상미)] -주제 : 백남준과 샤머니즘, 플럭서스 그리고 메타버스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2 전시실 -일시 : 11월 27일(수) 14시 -특이사항 : 전시 관람자에 한하여 전시티켓 비용 전액 지원 이번달 포럼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작품들 관람과 토론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샤머니즘을 표현한 카이젠, 플럭서스의 윤지영, 부리콜라주의 양정욱은 물론 메타버스의 권하윤 작가의 작품들을 둘러보고 토론을 나눌 예정입니다. //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티켓 구매 비용은 백남준포럼에서 전액 지원해드립니다. (티켓 제시 후) [제 13회 백남준포럼(대표 이상미)] 백남준 텍스트 같이 읽고 해석하기 혹은 같이 감상하기]  / 백남준 '굿'이론 혹은 '.. 더보기
[백남준] 플럭서스와 어떤 관계인가? 이 운동 왜 일어났나? 플럭스서가 왜 일어났나? 서양적 예술의 룰을 스스로 깨겠다고 일어난 미술 운동이라 그렇다> 백남준 비디오아트를 태동시킨 플랫폼이 되었던 플럭서스, 이 예술운동의 키워드를 이 단체의 회원인 딕 히긴스는 이렇게 12개의 주제로 요약 매우 유용한 자료 / 1. 동서 예술가 다 모인 국제적 조직 2. 삶과 예술의 일치를 무엇보다 강조하다 3 여러 매체의 결합 인터미디어다 4. 삶의 경험이 중요 5. 우연성을 강조 6. 유머와 재미를 강조 7. 현학적인 것 싫어하다 8. 위기에 대처하는 긴박성 9. 유별난 특별성 10 감각적 예민성 11 시간성 12 음악성 더보기
[백남준]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유럽인에서 한국인으로 [1962년까지] 백남준 30살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백남준 아니라 유럽인(쇤베르크, 존 케이지, 플럭서스)이었다. 여기에 한계가 있었다.[1963년부터] 백남준 31살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유럽인 아니라 백남준이었다 그런 면에서 1963년 세계미술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다. 이제 드디어 백남준 나서다.  1953(도쿄대 재학 쇤베르크 논문구상)-1963(첫 전시 TV)-1973(인터넷 유튜브)-1983(위성아트)-1993(베니스 황금사자상)-2003(호랑이 살아있다/뉴욕회고전(뉴욕을 점령하다)/록펠러센터 앞:레이저아트) 더보기
[백남준] 그의 친구 '플럭서스'의 경제 사정은 어땠나? 독일시대(1958년~1962년) 정도 백남준은 유학비를 받아서 경제가 바닥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예술가들은 날마다 밥을 제대로 못 먹는 지경이었다. 남정호(뉴욕특파원)과 바우어마이스터와 인터뷰 소개 [질문] 남정호: 당시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었나? [대답] 바우어마이스터: 당시 우리는 너무나 배가 고팠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플럭서스 동료 중에 디자이너 겸 기자가 있었는데, 시내에서 리셉션이 열리면 우리는 2마르크를 모아 그에게 쥐여 주면서 그곳에 가도록 했다. 그에게는 아주 품위 있는 검은색 양복이 있어서 그것을 입고 리셉션장에 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보였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는 “아, 택시에 두고 내렸네”라고 둘러댔다. 연기까지 하며 행사장으로 들어간 뒤에는 호주.. 더보기
백남준과 절친이었던 2명 대통령(플럭서스회원) 백남준 전 세계 예술인과 지식인, 그들과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킹의 천재, 플럭서스 친구들 중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최초의 극작가 대통령으로 불리는 대통령이고 또 한 사람은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 후 의 초대 대통령이자 음악가이면서 100권의 저서를 남긴 이들과 우정도 각별했다. 1989년 리투아니아의 주권 독립을 위한 연설 중인 란즈베르기스. 리투아니아 국가중앙기록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