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코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남준] 독일사람들에게는 너무 황홀하고 경이로운 작가였다 [백남준] 작가 독일사람들에게는 너무 황홀한 작가인 셈이다 백남준이라는 작가 독일사람들에게는 너무 황홀한 작가인 셈이다. 그가 독일에서 공부했다는 점에 대한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 독일은 어떻게 하든 백남준을 독일의 작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베니스비엔날레 때도 독일관 독일작가로 출전시켰다 내년에는 베니스에 가야할 것 같다. 독일에서 백남준 최고미술대학 교수 임명에 이어 그에 대한 환대는 어디까지 갔나? 백남준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이 아닌 독일로 유학을 와 여기서 비디오아트를 시작했으니 백남준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겠는가? 독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다 서양에서 족보가 없는 미술이 독일에서 탄생한 셈이다. 여기서 슈톡하우젠과 존 케이지 만나고 결국 쾰른 대학교에서 철학까지 공부했다. 그렇게 .. 더보기 [백남준] 시게코가 풀어낸 백남준 이야기 1967-1984 백남준 뉴욕 4년차(1967년) 아직 보릿고개 시절 이런 기금(록펠러 13750달러)을 받다 / 백남준 1968년부터 1979년까지 11년간 미래 사회를 위한 보고서를 박사학위처럼 연구하면서 인류 행복을 위해 탐색하다. 뉴욕 벨 통신 연구소에서 초대를 받다1백남준 1967년 뉴욕 주립 스토니브룩 대학(아래 사진이 맞는지 모르겠다)에서 잠시 Communication Research Consultant 일했다 / 이 학교를 가본 적이 없어서 / 백남준 뉴욕 벨 연구소에서 아티스트로 1966-1968년 초대를 받다1백남준에게 1968년 뉴욕도 혁명의 해였다 반전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다. 뉴욕 컬럼비아(Columbia University in the City of New York) 대학에서 학생 혁명이 일어.. 더보기 [백남준] 뉴욕10년간(64-74) 보릿고개 넘기고 작은 아파트 분양 하버드 출신 부잣집 도련님(David 백남준과 독일 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동창)과 3년간(1969년-1971년) 결혼 지옥에서 탈출해 다시 백남준에 돌아온다. 시게코와 백남준은 드디어 (플럭서스의 창시자 마치우나스를 속여서 마련한 / 마치우나스(그의 부친은 뉴욕 주립대학 건축과 교수였다)는 당시 예술가 되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부동산업자로 변신했다) 소호에 작은 아파트를 얻을 수 있는 행운을 얻으면서 차차 안정감을 찾아간다. 백남준의 보릿고개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백남준은 1971년 보스턴 공영방송(WGBH)에 비디오 제작가로 잠시 취업도 하였다(1973년 백남준 대표작 초기 유튜브인 글로벌 그루브> 발표한다). 1974년 우려곡절(이 부분을 자세히 이야기 하려면 길다) 끝에 부처>를 발표해 뉴욕 미술계 지.. 더보기 [백남준] 그의 흠모자, 부인 된 시게코, 갑부집 딸, 전위예술가 [백남준의 부인이 된 시게코]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런데 그 집안을 보면 상당히 지식인 층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화가였고 그래서 미술지망생인 시게코 생애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고 그의 아버지는 도쿄대학 출신으로 중고교장이었다. 어머니는 갑부집안 딸이었다고. 시케코를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여자애라고 투덜거렸지만 딸이 미술을 한다고 하니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아버지가 딸을 위해서 지방 교장이었기에 동경에 가서 일본 최고대학 나온 미대생을 교사를 모시기 위해 동경 출장 갈 정도 그게 다 딸을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게코는 타고난 반항적 소녀였고 그래도 공부는 1등을 했다고 중고시절 우리나라로 치면 성인용 국전(일본 중앙미술전)에 학생이 출품을 해 입선도 했으니 천재 소녀가 태어..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