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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70대 (2002-2006)

[제3회 백남준포럼] 그의 유언 "21세기는 한국의 시대가 될 것!"

[3회 백남준 포럼], "21세기부터 30세기까지는 한국의 시대가 될 것이다 "

<3회 백남준 포럼 2024130> 2024129일은 백남준 18주년 기일이다. 장소: 광화문 스페이스 본

 

[백남준 유언] "21세기는 한국의 시대가 될 것이다" '작성 보완 중' 아래는 백남준 죽음과 관련된 10가지 키문장이다.

 

01 백남준, 죽음에 대한 생각, 불교 '극락왕생(죽음은 끝 아니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것이기에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사상>,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병) / 02 삶의 허전함(바니타스 Vanitas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이 삶의 환희(Jouissance)을 일으키는 원동력(죽음과 고통이 환희와 구원의 밑바당이 되다 역설의 진실) / 03 죽음의 세력 극복한 불멸의 백남준: 세계미술계에 이름 올린 한국의 유일한 예술가가 아니라, 세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비교 불가능한 예술가다. 뒤샹도 못 따라온다. 서구미술 우월주의를 백남준 한 방에 날리다. 그게 비디오아트라는 완전히 미지의 신대륙 예술. 세계미술사에서 서양미술에 한 번도 없었다 비디오아트라는 새 장르를 창조했다. / 04 인간은 성취가 아니라 '도취' 속에 살 때 죽음을 극복한다. 보들레르와 백남준 생각이다. 보들레르 왈 '취하라! 또한 50년 간 뉴욕에서 활동한 '임충섭' 작가의 말이기도 하다!' /

 

05 "영원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Der Ewigkeitskult ist di langste Krankheit der Menschkeit) - 백남준. 영원함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반대 현상을 일으킨다.  "모든 예술가의 로망이 내 작품이 영원히 오래오래 남는 것이다 "  그러나 백남준은 이마저 부정했다. "뭘 그렇게 남기려고 해!" /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백남준 데스마스크

 

/ 06 한국인은 죽음을 어떻게 극복해 왔나?? 한국인의 삶의 목적은 ''이다. 멋이란 한국인의 미학을 농축시킨 말이다. 멋에는 맛도 포함된다. / 살 맛이 나게 하는 것이 바로 멋이다. 또한, 멋이란 삶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면서 산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멋이라 또한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기술(노하우)이다. / 07 창조자의 삶을 살아야 죽음이 없어진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L'homme est à inventer chaque jour" / 08 "백남준은 죽으면서도 사람들 즐겁게" 유머감각 최고의 지성을 발휘하다 / 09 2000년 "백남준 호랑이는 살아있다" 21세기는 한국의 시대가 될 것!" / 10 <가장 먼 과거를 알아야 가장 먼 미래를>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30세기를 내다보다.

 

[왜 백남준은 생존 시에 데스마스크 만들었나? 이 마스크는 언제 만들었나?] ‘Nam June Paik Death Mask’ this mask was sculpted by a friend of Paik’s Yongjin Han in around 1994. 백남준 절친 한용진이 1994년 뉴욕에서 조각, 주조한 청동 '데스마스크' <삼성동 봉은사 소장>

 

[백남준 뉴욕 자택 SOHO 머서(Mercer) 스트리트 110번지 어디 있나?]

 

위 사진 그의 아파트 입구. 우리가 보기에는 입구가 아닌 곳처럼 보인다. 백남준은 이 아파트 5층에 살았다. 한 번은 장마철 비가 억수로 내려 그의 지붕에 물이 새는 바람에 전자제품이 큰 타격을 당하기도 했다. 근처 뉴욕 대학과 예술 거리 Washington Square가 있다.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

 

1 죽음()이 인간()을 구원한다(죽음=구원). - 空卽是色

2 백남준, 죽음에 대한 생각, 불교 '극락왕생(죽음은 끝 아니라 다시 태어난다)'사상>

존 케이지가 죽었을 때 누군가 백남준에게 "마음이 어떠했느냐? 울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다. 남준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도 눈물을 안 흘렸다.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든 가는 것이니까. <어딘 가에 나의 어머니가 계시겠지. 나도 따라가면 되는 것이지> 거기서 만나면 된다는 생각에 슬프단 생각은 안 해요"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왕생()'을 떠올렸던 것이다. 왕생은 이 세상에서 죽어 다른 세상에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다.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백남준 TV세계로 통하는 '' 즉 인터넷을 열다. 조선시대에는 숭례문이 있었다. 요즘 정치는 모든 문이 닫혔다.

 

3 죽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은 허무다(Tout est néant, excepté la Mort) [우리가 죽음 그 이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진정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보들레르

 

4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잘 살기 위해서다. – 앙드레 말로

그런데, 서양 사람들 죽음에 대해 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백남준 서양사람들 동양의 지혜문서를 잘 몰라 위 책에 영어로 번역해 수록하다

 

5 그러나 공자 왈, 삶도 모르는데 죽음까지(Death : Someone asked Confucius about death. The master answered : "I don’t know even about live, how can I know about death?") 이 백남준 번역은 그의 영어 에세이, <우리는 열린 회로 속에 있다>에서 나온다.

 

6 천상병, 역시 시에서 대가(마에스트로)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밖에 없는 엽전(돈)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 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천 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 길 밤 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 한 가지 소원 - 천상병

 

7 귀천(본향 회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네덜란드 메멘토 모리 화풍

 

8 서양미술사에 죽음을 말하면? 네덜란드 '죽음을 기억하라' 화풍이 생각난다(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진정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삶의 허전함(바니타스 Vanitas)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로마시대부터 전해오는 말이다.

 

9 17세기 말 네덜란드 회화에서 이런 화풍이 전성기를 맞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네덜란드가 해상권 잡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돈이 많은 '초부자(Super Rich)'만이 맛볼 수 있는 정서다. 부자의 쓴맛을 제대로 본 것이다. 어설픈 부자는 이런 경지에 가지도 못한다. 풍요 속 빈곤이라고 할까. 이 서양미술 전통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20세기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데미안 허스트

 

10 [백남준 디지털 시대의 예술론] / '사이버네틱스와 인터미디어 미학'이 담긴 자신의 <예술 골자>를 백남준은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1) 카타르시스(건강한 배설), 2) 순간의 환희, 3) 모든 감각의 만족, 4) 전인격 총체적 개입, 5) 극도의 전자적 충동, 6) 두뇌의 전기 자기 진동, 7) 직접 접촉 예술, 8)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9)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10) 정신의 사이버네틱스, 11) 인공신진대사, 12) 다매체 다방향 상응주의(Correspondence) 등등. " 그는 확실하게 전자적 축제주의자 감각적 쾌락주의자.

백남준 I "걸음 위한 선" 1979년. 장소 쾰른

 

11 백남준 I "걸음 위한 선" 혹은 "줄이 달린 바이올린" 영상, 1979년. 장소 쾰른. 이걸 찍은 사람은 "W. 헤르조겐라트" 박사. 그는 독일에서 유명한 미술사가로 이 액션에 담긴 의도를 알았다.

 

12 위 예술론과 위에서 보는 과감한 행위예술을 하는 백남준 같은 이에게는 죽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안 죽는다는 소리가 아니라, 니체, 초인사상 너무 영웅적인 표현이지만 백남준 그런 면이 있다. 백남준 같은 예술가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13 불멸의 백남준, 세계미술계에 이름 올린 한국의 유일한 예술가가 아니라, 세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비교 불가능한 예술가다. 뒤샹도 못 따라온다. 서구미술 우월주의를 백남준 한 방에 날려버리다. 그게 비디오아트 완전히 미지의 신대륙 예술. 세계미술사에서 서양미술에 한 번도 없었다는 면에서 기념비적이다. 백남준은 새 장르를 창조했다. 바로 비디오아트.


<피카소가 카라바조보다 더 위대한가?>

카라바조와 그의 후예들 뮌헨 시립미술관 전시

 

1 카라바조와 그를 모방한 네덜란드 등 유럽 작가들 그리고 피카소도 예외가 아니다. 피카소는 인기 작가이고, 작품도 최고 고가다. 입체파의 창시자다. 그러나 피카소와 카라바조 누가 더 위대한가? 잘 모르겠네요. 뒤샹은 한계에 도달한 이런 서양 회화전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레디-메이드를 만들었다는 면에서 위대하다.

 

2 그런 면에서 피카소보다 한 수 위다. 그러나 뒤샹도 백남준에 비해서는 한 수 아래다. 백남준이야말로 세계미술사에서 진정한 창조자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듣도 보도 못한 전혀 새로운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것이다. 그리고 유튜브와 인터넷과 SNS 소통방식의 시대를 열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핸하르트'는 백남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

 

3 여기에 미술 평론가 진중권이 한 마디를 더하다. 세계미술사적으로 볼 때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20세기 전체는 뒤샹, 그러나 21세기는 백남준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부친과 윤동주 연전 동기동창

 

4 27살에 죽은 일본의 옥중에서 죽은 윤동주의 시는 영원(?) 부친과 윤동주

 

<부친 사망, 내게 예술로 지향>

 

1 나는 1980년 초 제대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시를 써봤다. 그리고 45년 지났다. 그런데 제대로 된 시가 없다.

부친 김갑권 1957년 스위스 제네바 레만호수

 

2 1970년 나에게 너무 큰 존재였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간 고민을 했다. 인간의 죽음과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삶의 의미는 뭔가? 일종의 바니타스(Vanitas)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10년간 물음 끝에 답이 나왔다 "고통이 구원이다"

 

3 이것은 사실 삶에 대한 내 나름의 수준 높은 긍정이었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과 비슷한 생각이다. 그때부터 시를 쓰다.

 

4 그런데 이런 고민은 2500년 전 부처가 이미 했다. 부처가 내놓은 대안은 바로 고집멸도(苦集滅道 Suffering, the origin of suffering, and the way to release from suffering)와 비슷한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고통이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설인데 내가 생각가 많이 닮았다. 그러니까 내 고민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오다 1973년 유튜브 성공

 

5 고집멸도 the Four Noble Truths (Budd.), namely: all life is suffering , the cause of suffering is desire , emancipation comes only by eliminating passions , the way 혹은 to emancipation is the Eight-fold Noble Way 八正道 // 1) 苦諦: 중생들의 세간은 라는 것, 2) 集諦: 의 원인인 번뇌망념이 모이는 것, 3) 滅諦: 을 멸하여 제거하는 것, 4) 道諦: 해탈의 경계에 도달하는 수행의 도리(八正道)

 

<영원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

 

1 "영원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Der Ewigkeitskult ist di langste Krankheit der Menschkeit) - 백남준. 모든 예술가의 로망이 내 작품이 영원히 오래오래 남는 것이다. 그러나 백남준은 이마저 부정했다. "뭘 그렇게 남기려고 해!" /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2 "현재가 유토피아다. 이런 관점이 중요하다(Jetzt ist:Utopia Das ist Wichtig)" - 백남준.

그는 화엄경에 말하는 "찰나가 영겁이다"라는 말을 믿은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남기는 것도, 과거를 미화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충실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의 종말적 삶, 즉 내일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치열한 삶의 방식으로 살았던 것이다. 스피노자 말 "내일 지구에 종말 와도 오늘 난 한 구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3 화염의 세계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에 나오는 시 한 구절과 닮았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4 위 Future Now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미래(Future)의 시점에서 현재의 역사(Now)를 쓰는 게 예술이다" - 백남준 / 위는 2019년 런던 테이트 모던 백남준 전시,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순회전 때 포스터

 

<죽음을 넘어서는 비상구>

 

1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라틴어 어원을 보자. 죽음(mor) 사랑(amor)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 앞에 a가 들어가면 반대급부가 된다. a(극복)+mor(죽음)=amor가 된다. , 사랑은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메시지다. 사랑이란 결국 영원한 창조를 말한다.

 

2 죽음을 극복하는 방안 하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 속에서 나오는 명대사로 기억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Seize the Day: 오늘을 사랑하라!"

 

3 인간은 성취가 아니라 '도취' 속에 살 때 죽음을 극복한다. 보들레르와 백남준 생각이다. 또한 50년 간 뉴욕에서 활동한 '임충섭' 작가의 말이기도 하다. 보들레르 왈 '취하라!'

항상 취하라 - 보들레르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시간의 끔찍한 중압이 네 어깨를 짓누르면서

너를 이 지상으로 궤멸시키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끊임없이 취하라.

무엇으로 취할 것인가.

술로, 시로, 사랑으로, 구름으로, 미덕으로

네가 원하는 어떤 것으로든 좋다.

 

다만 끊임없이 취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물 위에서나

당신만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이미 취기가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줄 것이다.

 

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4 한국인은 죽음을 어떻게 극복해 왔나?? 한국인의 삶의 목적은 '멋'이다. 멋이란 한국인의 미학을 농축시킨 말이다. 멋에는 맛도 포함된다. / 살 맛이 나게 하는 것이 바로 멋이다. 또한, 멋이란 삶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면서 산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멋이라 또한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기술(노하우)이다.

 

5 멋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 다르다. 영어로 하면 stylist 혹은 smart, well-being 프랑스어로 말하면 chic, charmant 정도이고 / 과거에는 한국인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멋지게> 살려고라고 90% 이상 대답했다. 신자유주의에서 <> 사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잘 사는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6 자기만의 고유할 스타일 창조자가 바로 멋진 사람이다. 물질의 영향을 덜 받는 삶의 방식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 '안빈낙도/청빈낙도(安貧樂道/淸貧樂道)' 돈은 충분하지 않아도 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영어로 low price, high life 혹은 low price, high happiness 하여간 그렇다.

백남준 아파트 앞

 

7 백남준에게 왜 평생 그렇게 많은 퍼포먼스 했냐고 물어보면 '돈을 벌지 않는 예술'을 하기 위해선데 거기엔 진리를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고 말한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그에게 퍼포먼스는 죽임을 극복하는,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행위다.

 

8 백남준은 예술기금을 많이 받아도 원래부터 돈이 목적이 아니기에 더 좋은 작품을 위해 받은 기금보다 2배 이상 쓰기에 평생 가난했다. 백남준이 왜 선문답인 '임제록' 등을 그리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9 "우리는 어떻게 75%에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50%에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30%에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9%에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0%에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1000%에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 임제록 중에서

 

10 그는 또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는 축제주의자인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기 위해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친구들도 다 그런 성향을 보였다.

 

11 인간이 태어난 이유는 잘 놀기(자기만의 역할 잘하기), 여행도 하면서 그래서 일을 하는 것이다> 돈보다 축제가 먼저인 르네상스 인간... 무욕·무상행으로 삶의 향연을 즐기다.

1978년 백남준 뒤셀도르프 미대 교수 취임하다

 

12 백남준은 1977"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라고 말을 했는데 역시 돈보다 축제를 우선시하는 그의 철학이 담긴 말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으려면 무욕의 경지로 가서 소유보다는 자유와 더 나아가 향유를 삶의 최고 가치로 두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래야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주장인데 이게 바로 그의 예술론과 직결된다. 아랫글을 보면 알 수 있다.

 

13 백남준 왈, "최고의 국가안보는 예술을 꽃피우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예술은 무엇보다 <평화와 포용과 공존을 지향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표현은 인간의 자유를 뜻한다. 예술은 인간의 배설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 백남준(1998년 교토상 수상 상금 6~7억, 노벨상의 2분의 1 수준)

 

14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L'homme est à inventer chaque jour" - 사르트르(J. P. Sartre) 인간은 창조자가 되는 순간을 살아있는 시간이 된다. 실존의 시간. 우리가 살아있어도 창조를 하지 못하면 죽은 시간이라는 말인가 보다. 사르트르는 전쟁의 시기에 옆에서 죽음을 날마다 접하면서 실존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15 백남준이 사르트르를 좋아한 것은 같은 전쟁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은 시인은 "우리 세대는 절반이 죽었다"라고 했지만, 그보다 한 살 위인 백남준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20092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현실문화연구 발행인 김수기 씨는 백남준의 청년기를 '전쟁 세대'로 규정한다. 백남준이 예술적으로 극단적이고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 것인가.

 

16 "백남준의 청년기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전쟁으로 점철됐다. 백남준이 태어난 지 1년 전인 1931년 만주사변이, 1937년 중일전쟁이,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중략) 특히 1950년 6·25 피난과정에서 겪은 상처로 삶과 예술의 뭔지를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됐다."

 

17 백남준 많이 인용한 말,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할 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I am always, what I am not and I am not, always what I am - Sartre) (Le sujet est: Quel est le sens de cette phrase paradoxale: "je suis ce que je ne suis pas, je ne suis pas ce que je suis) 이 말은 이런 뜻이리라.

 

<죽음에 대한 태도>

 

1 예술가는 죽음에 도전하는 자, "예술가란 (목숨 걸고) 외줄 타는 사람이다" - 백남준 1984년 인터뷰에서

 

2 <자신(original)을 살지 않고 세상(copy)을 살아가면 삶의 허무가 온다

 

3 요셉 보이스, 카리스마 몽골 코드, 그는 서구 예술가 중 드물게 디지털 노마드 셔먼(예술 무당)이었다. 요셉 보이스는 서구의 예술 무당이었다면, 백남준은 세계의 예술 무당이었다.

 

4 장자의 '허심'(아래 원문)과 백남준의 '황홀'은 같은 것이다 강신주 / "모든 사물에는 저것 아닌 것도 없으며, 이것 아닌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도 또한 저것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곧 저것과 이것은 잇달아 생긴다는 것이다

 

5 이런 말도 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보는 것이다 / (照之於天)"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 彼是乎哉[]果且无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 得其業中,以應无窮,是亦一无窮,非一无窮也, 莊子, - 齊物論

 

<백남준 장례식 이야기>
- 아래 내용은 구보타 남정호 저서 <나의 사랑 백남준> 중에서 발췌

 

1 "남준은 늘 조용히 나를 지지하고 내 편을 들어주어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속의 부처였다" - 추모사를 낭독하는 오노 요코(2006.02.03) 연인 관계라는 설(?)도 있다. 아래사진은 권연정 큐레이터가 뉴욕에 출장 갔다가 우연히 참가하게 된 백남준 장례식 사진 그날 뉴욕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서는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이 사진 저작권을 허락

뉴욕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 사진저작권 권연정

 

2 시게코 여사의 증언, 살아생전 물질적인 부를 경멸하던 남준이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호사스럽게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맨해튼 중심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을 골라 남준을 뉘었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장례가 열리는 곳이다.

장례식날 뉴욕 폭설&nbsp; 사진저작권 권연정

 

3 조문객들에게 사자의 마지막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마호가니' 관 안에 남준을 누이고 생전 그를 흠모하던 이들을 맞았다. 남준의 예술과 기지, 그리고 반짝이는 유머에 반한 이들이 많았던지 조문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조문객들 넥타이가 수북이 쌓이다&nbsp; 사진저작권 권연정

 

4 관 속에서 잠자듯 평화롭게 누워 있는 남준을 바라보며 나는 그와의 삶을 하나둘 반추해 보았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었다. 내 옆에 있되 내가 온전히 차지할 수 없는 남자인 것 같아 가슴 졸인 시간은 또 얼마였던가. 육신에 병이 깃드는 바람에 가까스로 결혼했지만, 그래서 결혼식 날 하염없이 슬픈 신부였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사진저작권 권연정

 

5 어찌 되었건 이 남자를 내 남편으로 만든 날이었으니, 예술적 감성과 재능, 인간적 매력을 함께 갖춘 이 우주적 천재를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그의 광채가 너무 눈부셔 함께 예술을 하는 아내로서 주눅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런 그늘이 또한 나를 예술가로서 더욱 정진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사진저작권 권연정

 

6 가난하던 시절, 돈에 대한 개념이 없이 비싼 TV를 수백 대씩 사들이던 그 때문에 나는 더 가난하게 예술을 해야 했지만, 그의 작품이 하나씩 탄생하는 것을 볼 때마다 너무 경이롭고 신기해 모든 아픔을 잊고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던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옆에서 간호하느라 작품 창작은 아예 손 놓고 말았다.

7월 20일 그의 생일

 

"백남준은 죽으면서도 사람들 즐겁게"

 

<숙연하던 영결식장 곳곳에서 조문객들의 밝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1 '오노 요코'가 가장 먼저 조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넥타이를 싹둑 잘랐다. 이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조문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일들이 벌어졌다. 조문객들은 잘린 넥타이를 들고 줄을 섰다. 그러고는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남준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뒤 울긋불긋한 넥타이 조각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2 1960년 독일에서 남준이 연출했던 넥타이 자르기 퍼포먼스(불교에서는 '단'이라 한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는 자리에서 재연된 것이다. 조카는 "고인이라면 자신의 장례식에서도 뭔가 했을 것"이라며 "오늘의 퍼포먼스는 그런 고인을 기리기 위한 이벤트"라고 설명했다. 조문 과정은 여느 망자 부처, 야곱의 사다리와 다른 바 없었지만, 마지막 장례식만은 지극히 남준답게 치러진 셈이다.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

 

1 뉴욕타임스(2006) 백남준 부고 기사 2편 중 하나, '성공한 반란자' 남준이 매일 아침 읽고 또 읽었던 뉴욕타임스가 남준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용한 단어다. 떠나간 비디오아트의 거장을 애도하며 이 신문은 남준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2006년 백남준 사망 때 뉴욕타임스 애도 기사 백남준을 세계미술사에서 성공한 반란자(renegade)라고 평가했다. 아래 영어원문 링크 https://seulsong.tistory.com/866https://seulsong.tistory.com/866

 

 

Turning Television Inside Out, and Art Upside Down (Published 2006)

Roberta Smith appreciation of artist Nam June Paik, who has died at age 73; Paik is widely considered inventor of video art; career recalled; photos (M)

www.nytimes.com

 

2 많은 예술가가 기존의 심미적 관념을 조롱할 방법을 찾기 위해 자신들의 젊음을 바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반란자의 지위를 늙을 때까지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백남준은 기존의 심미적 관념에 대한 반란자로 성공적인 삶을 보여준 위대한 예술가다. - 뉴욕타임스 2006년 백남준 부고 기사 중에서

 

3 또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백남준은 자신이 열어온 새로운 시대의 도전을 이해했다. 그는 예술과 기술을 결합하는 핵심 목표는 "또 다른 과학 장난감을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기술과 전자 매체를 어떻게 인간화하는가"를 주장했다. 그는 비디오로 음악을 작곡한 20세기 비발디였다" - 2006년 뉴욕타임스 백남준 부고 기사 중에서

베를린 대학에서 <소호 4중주> 연주 1976.09.05

 

<다양한 장소와 방식의 백남준 사후 행사>

 

200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추모행사

 

1 남준을 기리는 49재 행사는 봉은사에서만 열린 게 아니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대전, 전주 등에서도 남준의 장례식 때 이뤄졌던 넥타이 자르기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2 백남준 어떻게 떠나보내나 그 절차를 봅시다.

 

3 한 사람을 온전히 떠나보내기까지는 많은 절차가 필요한 법이다. 장례식이 끝나자 그다음은 남준을 어디에서 영면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를 고향에 묻자는 데는 주변 사람들 모두 이심전심이었다. 그렇다면 남준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를 낳아준 한국? 아니면 그가 공부하고 예술가의 삶을 시작한 일본 또는 독일? 그도 아니면 그가 40여 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미국이 고향인가? 누구도 정확히 얘기하지 못했다.

봉은사 법왕루에서 백남준 13주기 추모재
2024년 백남준 18주기 추모재 한국 측 대리인 '도로시 남'(백남준스튜디오대표) 인사말

 

4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남준은 그 모든 곳이 고향인 세계인이라는 것. 그리하여 화장해 재로 변한 남준의 유골을 한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 등 세 곳에 조금씩 나눠서 안치하기로 했다. 남준의 <유골>49재를 3일 앞둔 315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우리는 남준의 유골을 영정 사진과 <내 손>이라는 제목의 유작과 함께 서울 강남 삼성동 봉은사 <법왕루>에 모시기로 했다. 한국 측 대리인 도로시 남(백스튜디오 대표)

 

5 31849재 날, 남준의 영혼을 완전히 떠나보낼 시간이 왔다. 1천여 명이 몰려와 그의 특별한 49재를 지켜보았다. 초봄의 다사로운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던 오후 6시 무렵, 여성 무속인 '이비나'가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시퍼런 작두에 맨발로 올라가 신들린 듯 춤을 추던 이비나는 흰 천과 붉은 천, 삼베 천을 50 갈기갈기 찢기도 했다.

 

6 곧이어 <조카>가 바이올린에 줄을 매달고는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남준이 45년 전 벌였던 퍼포먼스 '땅에 끌리는 바이올린'을 재연한 것이었다. 다음은 1962년의 퍼포먼스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독주' 차례였다. 남준의 벗 존 하트가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단숨에 내리쳐 부숴버렸다. 추모객 100명도 똑같이 바이올린을 산산조각 냈다.. 파괴의 시간이 지난 후 이번에는 조용한 선의 순서가 되었다.

 

7 추모객은 <다다익선>을 본떠 만든 촛불 탑에 촛불을 세웠다. 부디 편안히 가시라는 간절한 기원이었다. 마지막으로 촛불 탑을 불태우면서 추모행사는 막을 내렸다.

 

<사후> 오노 요코 구겐하임에서 백남준 '추모굿'

 

1 49재 한 달 뒤인 2006426일 오후, 그가 마지막 예술혼을 불살랐던 뉴욕 맨해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도 그의 넋을 기리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번에는 오노 요코가 전위예술가로서 퍼포먼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동그란 선글라스에 검은 옷차림의 오노 요코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죽은 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2006년 4월 26일 오노 요코 뉴욕 백남준 추모제

 

2 등 뒤에는 사람 키만 한 푸른 중국 도자기 사진이 걸려 있었다. 10분쯤 정적이 흘렀을까. 미동도 하지 않고 입을 꼭 다 문 채로 있던 오노 요코가 절규하듯 외쳤다. "동서남북의 신이시여, 부디 백남준의 영혼을 지켜주소서, 지켜주소서!" <관련기사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060428/8301131/1

 

3 백남준의 절친 오노 요코 씨는 부서진 꽃병조각 옆에서 뜨개질을 하며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행사가 끝나고 참석자들은 퍼포먼스에 사용된 450개의 꽃병 조각을 하나씩 간직했다. " 오노 요코 : 한 조각씩 가지고 가세요. 10년 후의 약속입니다"

 

4 퍼포먼스에는 미망인인 구보타 여사, 그리고 뉴욕 예술계 관계자들과 일반 시민 등 5백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볼프 헤르조겐라트(독일 브레멘 미술관장)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20세기 비주얼 아트에 몰고 온 사상입니다" - SBS 뉴스

 

구겐하임 미술관, '백남준 추모' 퍼포먼스

지난 1월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 그는 세상을 떴지만 세계 예술계는 아직 그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열린 추모전 소식, 임상범 기자가 보도합니다.

news.sbs.co.kr

 

백남준 가장 위대한 시기(1996-2000) , '인간승리

 

1 1996-2000년 백남준의 인간승리, 그의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19963, 백남준은 신시내티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찾아갔다. 미국 중부의 신시내티는 추운 도시였다. 가뜩이나 추위를 많이 타는 남준에게는 북극과 다름없었다. 원래 샌프란시스코 공연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일본 후쿠오카까지 들러 추운 날씨에 친구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감기에 걸렸다. 그 몸으로 한국에 오니 애걔 누나(작은 누이)가 깜짝 놀랐다. “남준아, 네 얼굴이 시커멓잖아."

백남준과 이건희 회장

 

2 미국에서 몸살기가 회복되지 않았는데 삼성 호암상(스웨덴에서 주는 노벨상, 상금 12억 정도 노벨상에는 예술 분야가 없다)이 있고 일본에는 교토상(상금 6억 정도 백남준 이 상도 나중에 받다)이 있고 한국에서는 호암상이 있다)을 받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온 것이다.

 

남준은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다. 당뇨병을 심하게 앓아 각종 증상에 시달렸다. 늘 피곤했고, 어디서든 잤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장 뜰 한복판에서 코를 골고 자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오랜 여행에 따른 피로를 견디지 못하는 그는 잠이 쏟아지면 전시관 뜰이든 차 안이든 코를 골며 잤다.

2000년 뉴욕 자택에서

 

3 한국에 다녀온 다음 날인 199649(부활절), 남준은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나도록 재채기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의식이 없었고, 입은 일그러졌다. 앰뷸런스가 달려와 남준을 병원으로 싣고 갔다.

 

4 응급실에 옮겨진 남준은 정신을 차렸다. "걱정하지 마, 시게코. 오늘이 부활절이잖아. 예수가 부활한 날에 살아났으니 난 절대 죽지 않아." 왼쪽 반신을 마비시킨 뇌졸중이 찾아왔다. 그의 부모는 모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남준과 시게코는 절망했다. 그 외롭고 힘든 나날을 지나 명성을 얻을 시점에 쓰러진 것이다. 힘겹고도 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0년 백남준 호랑이는 살아있다

 

5 그리고 2000년 구겐하임 전시 전이 열리기 직전인 2000 0시에 새로운 1000년을 맞이하면서 전 세계 77개국 <호랑이는 살아있다>는 위성 아트를 보냈다. 여기서 백남준 글로벌 비저너리로 미래를 멀리 보는 유언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21세기는 한국의 시대가 될 것이다>. 20세기에 그렇게 고생한 한국은 그 보상을 받을 것이다 21세기는 한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호랑이 시대가 될 것이다 (이 내용은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전시 때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뇌졸중 쓰러진 백남준 2000년  야곱 사다리 타고,  화려하게 부활>

1986년 위성아트 총지휘할 때 모습

 

1 2000년 백남준은 뉴욕 구게하임 회고전을 통해 전 세계 미술을 호령했다. 세계미술사에 전례가 없는 전시를 열었다. 바로 레이저아트다. 이건 첨단 과학 예술이기에 미국 우주항공국(NASA) 도움 요청했고 그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높은 하늘로 승천했다. 물론 백남준 투병 과정에서 이렇게 투덜거리기도 했다. "천벌을 받은 거야. 세계 30개 도시의 초대전을 몽땅 받아들여 야심과 야욕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런 벌을 받은 거지"

 

2 1996-2000년 백남준의 인간승리, 그의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백남준 특유의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2000년 레이저 아트를 타고 화려하게 부활해 하늘로 승천했다.

2000년 구겐하임

백남준은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레이저 아트로 형상화하다. "미술관 천장에 있는 작품이 천(Sky)이라면, 1층 플로어에 깔린 100개의 모니터는 지(Land)야. 그리고 7층까지 복도에 전시된 과거 작품은 인(Human)이야. 겉으로 서양 기술부터 보이지만 실은 한국적 철학을 담으려 했지" - 백남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nbsp; 달콤하고 숭고한&nbsp; Sweet and Sublime

 

3 예수의 죽음(수난)과 부활처럼 백남준은 뇌졸중은 쓰러진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백남준은 2000년 뉴욕 구겐하임 회고전에서 레이저 아트(시게코 왈 완전히 새로운 예술의 처녀지)를 통해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달콤하고 숭고한 천국으로 승천했다.

 

4 다시 요약하면, "백남준 1996(64) 4 9일 갑자기 쓰러지다. 백남준 2000(68) 1) 새천년에 '호랑이는 살아있다' 전 세계에 마지막 위성 아트를 77개 국가에 내보냈다. '내가 호랑이고 나는 살아있다' 혹은 한국은 호랑이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발표하다. 백남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2) 그러나 백남준 2000(68) 구겐하임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에서 레이저아트가 되어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달콤한 천국으로 숭고한 하늘로 승천하다. 이 전시가 더 빛나는 것은 그가 휠체어를 타고 작업을 해야 하는 불편과 어려움 속에서 이런 작품을 했다니 경이롭다.

 

<가장 먼 과거를 알아야 가장 먼 미래를>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사이버네틱스)의 무한제곱이다('La nostalgie est un feedfack au carré)" - 백남준

 

사이버네틱스의 핵심에는 피드백 고리가 있는데, 이것은 체계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는 과정이다. 이 피드백은 체계 내 부분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외부환경과 관련된 체계의 실행에 관한 정보를 포함한다. 피드백 고리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또 그는 노스탤지어(아주 먼 과거, 선사시대), 피드백(시대정신), 무한제곱(30세기 미래 전망),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를 알아야 가장 먼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소리로 해석되기도 한다.

 

<백남준아트센터>

 

1 백남준 아트센터: 남준이 떠난 후 반년이 지난 20068월 말, 한국의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계획은 남준이 구겐하임 회고전을 끝내고 1년쯤 지난 200111월부터 경기도 측과 논의된 일이었다.

백남준 아트 센터

 

2 건물 설계는 국제적인 공모를 거쳐 당선된 독일의 건축가 '키르스텐 쉐멜(Kirsten Scheme)'당선되었으나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여 이를 받아 '마리나 스탄코빅(Marina Stankovic)' 축소된 저예산으로 이 건축을 맡았다. 건물은 남준의 이니셜인 'P''피아노'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Marina Stankovic

 

3 마리나 스탄코비치(Marina Stankovic)는 건축가로서 20년의 경험을 보유하고 있으며 인테리어, 건물 및 도시 계획의 창의적인 디자인 분야에서 광범위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그녀는 캐나다,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독일에서 살면서 일했다. 공간적, 사회적 맥락, 개념적이고 혁신적으로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 설루션, 프로젝트 계획 및 조정에 대한 고객별 접근 방식을 강조하는 디자인 분야의 특별한 전문 지식을 갖췄다. 실무 작업 외에도 스탄코비치 교수는 국내 및 국제기관에서 강의를 저서 출판되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그녀는 하버드 대학 디자인 대학원의 Loeb Fellow였다. 2005년부터 스탄코비치 교수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응용과학대학교 HTWK에서 건축, 인테리어 및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4 백남준아트센터에는 20085월 완공된다. 백남준 약 2년 후 완공되었다. 남준이 구겐하임 전시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레이저 아트 <삼원소>를 비롯해, TV 물고기> <TV 시계> <로봇 K-456> 등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 이름은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