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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40대 (1972-81)

[백남준] "나의 환희는 거칠 것 없어라"(II)

[창조하는(예술가)는 신과 대결하는 존재로 최고의 쾌감(주이상스)을 맛본다]

 

"나의 환희는 거칠 것 없어라" - 백남준 45세 선언 // 백남준 아래 음반(태극기를 단순화해서 그리다) 위에 나의 환희는 거칠 것 없어라고 적혀 있다 // 백남준, 다음 해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 되다 // "처음 쇤베르크 음반을 두 손에 쥐었을 때 난 마치 이집트 묘지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곧이어 느낀 절망감도 잊을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바그너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앞으로 2주만 있으면 나도 마흔다섯 살이 된다. 지금이야말로 '아방가르도의 고고학을 만들 때가 아닐까. 1940년대에 나는 한국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거의 모든 정보통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인쇄된 일본 서적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1947년 무렵, 나는 운 좋게 쇤베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악마라든가, 가장 극단적인 전위주의자라고 하는 것을 듣고 즉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쇤베르크의 악보는 피아노를 위한 곡 op.33a의 해석판이 유일했다. 그 음반을 구하려고 나는 2-3년간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정화된 밤>이라는 제목의 이 음반은 일본에는 이미 전쟁 전에 소개되었다. 처음 이 음반을 두 손에 쥐었을 때 나는 마치 이집트의 묘지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곧이어 느낀 절망감도 잊을 수 없다. 그의 음악 은 바그너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엄마로 하고 전쟁이 발발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25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뉴욕의 벼룩시장에서 쇤베르크의 같은 음반을 발견했다. 나는 머스 커닝엄의 발레 공연에 사용하려고 천천히 네 번 들어보았다(16회전으로). 머스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가 쇤베르크를 업그레이드했군!" - 197772, 함부르크

 

P.S. 오늘 나는 왜 내가 쇤베르크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생각해 본다.. 그가 가장극단적인 아방가르드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왜 그의 '극단성'에 관심을 보였을까? 나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다.

 

몽골... 선사시대에 우랄 알타이 쪽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들은 농업 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더 먼 곳을 보러 떠나야만 했다. 텔레비전은 그리스어로 '멀리 보다'라는 뜻이다. 멀리 보다= fernsehen = 텔레비전 / - 백남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