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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50대 (1982-91)

[나의 사랑 백남준] 발췌 소름 돋는 천재와 3살배기

소름 돋는 천재와 3살배기 아이 -나의 사랑 백남준 중-

<나의 사랑 백남준 중에서 발췌> 2011-01-04 소름 돋는 천재와 3살배기 아이

 

남준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사람이었다.

대론 세 살배기 아이처럼 단순하면서도 그의 사고와 지식은 비할 수 없이 심오했다.

 

존 케이지는 음악만 했지만 난 음악과 비디오를 섞어서 했으니 훨씬 뛰어난 것 아니겠어 그게 커뮤니케이션이고 현대적인 진화인 거야

 

 

 

 

 

 

타고난 명석한 머리와 비상한 기억력 그리고 광적인 독서욕은 그의 사고를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맴돌게 했다.

 

 

 

한국에서 발군의 수재들이 다녔다는 경기공립학교를 다니다가 전쟁을 만나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최고명문 도쿄대학 들어갈 때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신 남준은 굉장히 높은 점수로 도쿄대학에 합격을 했다고 한다. 입학금을 내려갔더니 학교직원이 자네 성적 정도면 법학과나 경제학과에도 갈 수 있는 데 왜 돈절이도 안 되는 미학과에 가려느냐고 말리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남준은 특히 논리적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수학 물리 이과과목을 잘했으며 기계 만지는데 능했다. TV브라운관의 내부회로까지 스스로 조작할 줄 알았다. 그가 일본인기술자 아베슈아와 함께 비디오신디사이저라는 첨단기계를 개발해 새로운 영상을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과학적인 사고력이 뒷받침해준 덕분이었다.

 

 

 

여기에 미래를 꿰뚫어보는 영감과 직관력이 갖추어 그는 기계문명의 수 십 년 후까지 훤히 내다보곤 했다. 비디오디스크의 기술이 처음 개발되던 1977년 그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비디오디스크가 앞으로 10년 동안 계속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예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쇄되지 않는 뉴욕타임스나 슈피겔출판사의 모든 작품을 저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뉴욕공공도서관의 책을 모두 소장할 수 있고 쉬면서 마음대로 어느 곳이나 펼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977년 당시 이미 컴퓨터기술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확히예측해냈던 것이다. 첨단기술과 기계에 정통했던 그는 이런 통찰이 가능했으리라

 

 

 

뭔가 하나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데 비디오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TV라는 기계를 파고들기 시작한지 불과 2년만에 남준은 자신이 개발한 기술에 대한 특허신청을 내기도 했다. 그는 196512월 미국 워싱턴 주재 상공회의소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저는 티브 영상의 뒤틀림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티브광고분야에 예술적이며 상업적인 목적에서 고용창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특허권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남준인 지라 그는 다시 태어나면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남준은 기억력이 비상했다. 특히 숫자에 대한 기억력은 혀를 내 두를 정도였다. 그는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다녀 전화번호수첩이 아예 없었다. 심지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기억력만은 생생해 여전히 전화변화 수첩 없이 지냈다. 이뿐 아니었다. 주요한 역사적 사건 특히 프랑스와 중국 혁명과 관련된 주요한 일들은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 귀신같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뒤에 일이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남준이 이 미술관을 다시 찾아가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일하던 14명의 큐레이터가 남준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 현관에 줄 지어 나와 있었다고 했다. 자연스레 남준은 이들과 한명씩 통성명 가볍게 인사 불과 몇 분 걸리지 않는 새 지극히 의례적인 만남 이었다. 그런 데 일년쯤 지나 남준이 이 미술관을 다시 찾았는데 귀신같이 14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해내더라는 것이다. 이를 곁에서 직접 목도한 한 미술평론가는 백남준은 인간이 아니다. 혀를 내둘렸고 한다

 

 

 

놀라운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개 수학적인 머리가 발달하면 언어나 역사 같은 문화 쪽 실력이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지 남준은 달랐다. 그는 한국어 일어는 물론 독어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6개국을 했다. 그중 일어는 거의 모국어처럼 완벽하게 구사 독어와 영어는 충분한 의사소통 가능 물론 두 나라언어로 책을 쓸 정도다. 프랑스어는 다른 언어보다 약하지만 중급수준이고 중국어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원서를 읽을 정도였다. 일본에 건너가기 전 홍콩에서 잠시 공부 중국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중국어책을 일부 영어로 번역 자신의 책에 담기도 했다.

 

 

 

그의 독서는 광적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니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동양고전에서 시작하여 전문적인 경제서적 읽고 또 읽는다. 독서를 너무 좋아한 탓에 아예 백과사전을 옆에다 갖다놓고 읽었다. 특히 공자와 맹자 즐겨 읽었다. 너무나 책에 몰두한 나머지 유럽등을 떠돌아 모처럼 나와 함께 있을 때에도 책장을 넘기는 온통 시간을 써 버렸다. 1982년 이래 남준의 작품을 쭉 거래해온 유대인 화상 칼 솔베이도 나를 만나러 신시내티에 올 때도 짐이라곤 늘 낡은 옷가지에 두툼한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말한 적이 있다

 

 

 

 

 

 

신문과 잡지 탐독하는 시간도 책 이상이었다. 남준은 매일 바지를 발밑까지 내린 채 화장실에 앉아 2시간씩 신문잡지 읽곤 했다. 그는 8개의 주간지와 4개의 월간지 3개의 일간지 읽었다. 그러니 웬만큼 바보가 아니면 만물박사가 안 되려고 해도 안 될 수가 없다. 남편이 똑똑하고 지적인 것은 누구보다 자랑스러웠지만 노상 책만 붙들고 있는 것 때문에 가끔 불만이 없지 않았다

 

 

 

남준의 여러 가지 장점 중에 주변의 모든 이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건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유쾌하고도 번뜩이는 기지였다. 오죽하면 그의 스승 존 케이지는 만약 당장 죽는다면 아쉬운 것이 뭐냐고 묻자 남준의 농담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해의 무더운 여름 도쿄에 있는 팔레시테 호텔 생긴 해프닝이다. 더운 날시에 헐렁한 티셔츠차림으로 덜렁덜렁 남준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도어맨이 기를 막고 나섰다 넥타이를 매지 앟는 손님을 입장할 수 없습니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요? 아루리 그러셔도 넥타이를 매지 않고는 들어갈 수없는 것이 저희 규정입니다 안 됩니다.

 

 

 

한참 옥신각신했으나 도어맨은 완강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선지 남준은 가방 안에서 티셔츠를 꺼내 입더니 도어맨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구했는지 넥타이가 인쇄된 티셔츠였다.

 

 

 

이젠 됐소? 이어 없는 짓이었지만 기막힌 임기웅변만은 그로서는 경탄할 수밖에 없었는지 도어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준을 들여보냈다

 

 

 

장점은 단점이 되기도 하는 법 너무나 빠른 두뇌회전과 풍부한 상상력 때문에 생각의 속도가 말하는 속보보다 빨라 그는 중간 중간에 들어갈 단어를 빼먹기 일쑤다. 보통사람들은 남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수많은 천재가 비슷한 특성을 보이지만 그래선지 그의 글도 서양에서 동양으로 고대에서 현대로 시간을 초월하며 어떨 때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종횡무진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오후 6시경 초 초저녁이 어둑어둑해지고 으스스하게 추워지기 시작하는데 무렵에 머리가 반즘 쉰 애꾸 무당이 젊은 견습무당 둘쯤을 데리고 대문을 지나서 내실문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아버지 형 나 등 남자는 전부 뒷문 밖으로 피신해야 한다. 여자끼리의 비의인 것이다. 어머니 누이 며느리 등이 줄을 지어 늘어서서 빌고 그 비는 대영 앞을 사회 신분적으로는 천하나 이 남다른 매력에 있는 무당이 들어온다. 처란하다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까 처량하다는 것은 처량한 것이지 lonely calmly도 아니다. 독일에 있는 unheimisch란 형용사가 이에 가깝다 늑대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을 까막까막하는 등잔불을 켜고 어느 시골 행랑방 안에서 듣는 것이 바로 처량하다는 말이고 맛이다 좌우간 이때쯤 되면 부엌의 큰 속 (그곳은 7세된 여자 한 마리쯤 구어 삶을 만큼의 크기)에서 양지머리가 스멀스멀 끌이기 시작한다

 

 

 

어떤 한국사람은 그의 어투를 보고 마치 이상의 소설을 익은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말의 보폭이 크다는 소리겠다 다른 사람이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전혀 듣지 않고 정신이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일본출신 개념미술의 거장 가와라 온이 우리 커플의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어늘 나에게 대놓고 투덜거린다

 

 

 

시게코 나는 남준이 뭐라고 하는지 통 못 알아먹겠어

 

 

 

가와라 온은 자기가 한 일을 매일 깨알처럼 책에 적어놓고 이를 현대미술이라고 내놓은 아주 독특한 미술가다 2008년에는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일본 예술잡지에 난 남준의 인터뷰기사를 읽어보고는 뭔 소리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남준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입이 머리속도를 못 따라가는데 어쩌란 말이야

 

 

 

말하는 속도가 두뇌의 회전속도를 못 미칠 정도로 명석한 남준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처럼 비상식적인 사람도 없었다. 가장 큰 특징은 하고픈 건 뭐가 됐든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 센 성격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자품창작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누구도 말릴수없었다. 한꺼번에 수백대의 TV를 사는 것은 제쳐놓더라고 작품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전혀 아까지 않았다 당연힌 작품을 만들 때면 뉴욕최고의 엔지니어와 비디오 에딕터로 불려야 직성이 풀렸다. 별달리 모아둔 돈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러한 금전적 무절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랬어. 돈을 물처럼 써야 한다고

 

 

 

당장 밥값 월세가 걱정되는 상황에서 돈을 물처럼 쓰니 말싸움이 없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먼지 투정이라도 부리면 곧바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날아왔다.

 

 

 

난 예술가란 말이야 돈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부자였다면 어떻게예술가가 되었겠어 당신이 안락한 생활을 원했다면 완전히 잘 못 결혼한 거야

 

 

 

금전에 대한 이런 태도는 그의 성장과정과 철학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선 명상 그리고 무소유 등을 중시하는 동양철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한국의 최고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궁핍함의 서러움을 모르고 자랐다. 자연스레 커서 꼭 돈을 벌어야겠다는 헝그리 정신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런저런 원인들이 어우러져 그로 하여금 물욕에 대한 부정 나이가 멸시까지 갖도록 만들었던 게 틀림없다. 여기에 예술창작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남준의 습성은 그가 비디오아트의 대가로 명성을 날릴 때조차도 그를 쪼들리게 만들었다

 

 

 

그는 2000년 이뤄진 한 인터뷰에서 살면서 제일 실패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명성도 얻었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그런데 나와 유사한 명성을 갖고 있는 예술가에 비하여 유독 돈을 버는데 실패한 것 같다. 믿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나는지금도 경제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 구겐하임 전시회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료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심지어 정든 작업실까지 팔려고 내놓았다. 지금부터라도 철이 들어서 자본가들이 돈을 들고 내게 어정어정 걸어오도록 만드는 비법을 연구해야겠다. 주위 친구들에게 이 비법을 연구하여 거의 성공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했더니 모두 웃고 믿지 않는다. 내 신용은 말이 아니다.

 

 

 

금전적 무관심 그저 아무렇게나 쓰는 선에 멈추지 않는다. 이런 성격 탓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상 사기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료비 작업비 등을 터무니없이 요구해 정상가의 몇 배를 뜯어내는 이들도 많았다. 속셈의 셈법에 무관심한 남준은 결과에는 집착을 둘 뿐 얼마가 들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작업결과가 만족스러우면 자기를 속이고 엄마를 챙겼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러니 아무리 자유분방한 예술라지만 살림을 책임진 나로서 견디기 힘든 노릇이다. 재료바가 아까워 고작해야 작품하나 당 한두 대의 TV를 사용하는 게 전부였던 나였기에 속이 부글부글 끊었다. 자연 그가 빠듯한 형편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무턱대로 사들이고 아니면 너무 어수룩하게 사기를 당하고 들어올 때면 나는 남준과 다투곤 했다. 아니 다투었다는 표현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냈다는 편이 옳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따지려 해도 말다툼이 격해진다 싶으면 남준은 슬며시 문을 열고 나가버려 도시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토록 면박을 주고 때로 호소를 해도 전혀 고칠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는 아예 포기하고 살았다

 

 

 

 

 

남준은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으면서도 소지품 못 챙기는 면에서 는 어린아이보다 심했다. 그래서 항상 뭔가를 잃어버리고 다닌다. 책을 가지고 나가면 십중팔구 빈손으로 돌아왔고 어디에 두었는지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질 나쁜 사람의 손에 넘어가면 얼마든지 통장의 돈을 빼내 갈 수 있는 수표책마저도 그는 자주 흘리고 다녔다 산책길에 떨어트린 수표책을 이웃사람이 발견해 돌려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준은 자신의 발명품이자 트레이드마크인 커다란 주머니 달린 셔츠를 노상 입고 다니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이는 와이셔츠양쪽 위에 커다란 앞주머니 두개를 꿰매 닭 물병 등 웬만한 건 이 안에 모두 집어넣고 다녔다. 물건 잃어버리는 악습관 때문에 입은 피해를 조금이랃 줄여보려는 나름의 방책인 셈이다.

 

 

 

볼 품이 있든 없든 자신이 고안해낸 이 패션이 남준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친구이자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Issey Miyake(사라문과 같이 작업함) 에게 이 독특한 셔츠를 선사하기도 했다. 자기가 입고 다니던 주머니 두개달린 예의 그 때가 묻은 와이셔츠를 말이다. 19922월의 일이다. 그는 이 독특한 와이셔츠의 진가를 깨우쳐주기 위해 친절한 설명서까지 곁들였다

 

 

 

 

 

바쁜 와중에 소생과 시게코를 생각해줘 고맙소 그 답례가 뭐가 좋을 까 생각한 끝에 소생이 디자인한 유일한 셔츠를 보내오 항공여행을 위해 특별히 다자인한 것으로 기내에서 옷을을 벗을 때도 여권이 절대 없어지지 않도록 커다란 주머니를 두 개 달았소 조금 더럽지만 지금은 빨 시간이 없음

 

 

 

 

 

한국에도 팬이 많다는 미야케는 일본전통의상인 기모노에다 서양은 물론 아프리카의상 등을 세련되게 조화시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패션계의 거장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다지이너이지만 남준이 선사한 와이셔츠는 어떤 최고의 명품 옷보다 귀하게 여기면서 아직도 곱게 모셔두고 있다고 한다

 

 

 

예술에만 전념할 뿐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남준의 습벽은 때로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불어오기도 했다. 1990년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남준은 지인인 이어령 당시 문화부장관을 만나기 위해 문화부청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청사에 들어가 경비원에게 장관실을 안내해 달락 했다가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

 

 

 

늘 입고 다니던 흰색셔츠에 파란색 주머니를 꿰매 단 행색이 오죽 남루했던지 경비원은 남준이 이어령장관의 손님이라는 걸 믿지 못했던 것이다. 소동 끝에 장관실에 결국 안내되기는 했지만 그의 옷차림이 얼마나 초라했는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일화다

 

 

 

걸핏하면 뭔가를 잃어버리는 거나 빼먹는 습관은 물건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도저히 어찌할 바 없는 건망증은 음악작품을 작곡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평생에 거쳐 6개의 소위 고향곡이라는 것을 작곡했는데 특이하게도 3번이 없었다

 

 

 

이를 두고 남준이 1973년 직접 해명한 적이 있었다. "3번은 작곡하는 것을 잊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남준다운 설명이다

 

 

 

자신이 봐도 좀 계면쩍었는지 그는 친구이자 미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켄 프리드먼 Ken Friedman 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교향곡 3번을 작곡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곡을 선사받았다. 그 후 남준은 프리드먼 이준 교향곡 3번을 자신이 만든 어엿한 작품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스럽게 내놓곤 했다.

 

 

 

잘 흘리고 다닌다는 점 이외도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우선 단것을 무척 좋아애 케이크 과자 등을 즐겼고 거피는 반이 설탕이다. 또 건강에 좋다는 채소는 멀리하고 육식을 즐겼다. 심지어 익혀서 먹어야 하는 베이컨조차도 날로 먹기도 햇다. 독일유학시절 요리하기를 무척이나 귀찮아 한 나머지 날로 먹던 버릇이 수십 년 때 계속된 것이다.

 

 

 

맛있는 거라면 자제할 줄 모르고 먹어대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일을 많이 하려면 많이 먹고 건강해야 하는 거야

 

 

 

믾이 먹는게 좀 무안했던지 때로 이렇게 유치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는데 그중에서 일본인인 내 눈에 특이하게 보였던 것이 있었다. 서양인이나 일본인들의 경우 고기면 고기 생선이면 생선만을 먹는게 일반적인데 남준은 노상 고기와 생선을 한꺼번에 먹으려했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토록 자유분방한 남준이었지만 술과 담배는 멀리했다는 점이다. 그는 술을 전혀 못하고 차를 즐겼다. 젊 은 시절 오노 요코 파티에 갔다 칵테일 몇 잔을 마시고 다음 날에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대취한 적이 있어 이 이후로는 절대 술을 입데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 어찌된 영문인지 만화 그중에서도 2차 대전과 관련된 만화에 푹 빠져지냈다 심지어 2차대전 때 만화를 책으로 엮어 출판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의 이 같은 담대한 계획은 이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못 찾아 안타깝게도 실험되지는 않았다

 

 

 

중요한 사안이 생기면 자기가 결정을 내리려 하지 않는 것도 남준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때는 무서울 정도로 과감하고 집요한 남준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창작을 할 때를 빼곤 술에 술 탄듯 물에 물탄 듯 언제나 똑 부러진 결정을 하지 않는다. 책임지기 싫어서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예술 이외의 모든 것들이 시시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흔들이는 나를 붑잡아 주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데이비드와 결혼할까말깜 물어봤을 때도 그리고 이혼을 하고 캘리포니아를 가겠다고 말했을 때도 잡지도 막지도 않는 남준이었다. 또 그는 내 건강은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어디가 아프거나 병이 생기면 어느 병원에서 누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할지 등은 모두 나에게 맡겼다

 

 

 

한마디로 그는 일과 예술과 자신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데만 온 에너지를 바친 사람이다. 그 안에는 소름 돋는 천재 예술과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런 그의 옆에서 때론 속을 썩기도 하고 때론 거대한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