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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70대 (2002-2006)

[백남준] 평생 가난, 부인 장례식장은 뉴욕 고급스런 장소 선정

백남준 평생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부인이 그가 사망했을 때만은 뉴욕에서 그래도 고급에 속하는 장례식장을 정했다고 한다. 죽은 순간만이라도 좀 편하게 보내고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백낙승)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 1920년대부터 1300여대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을 운영했다.

백남준 부친 방적기 공장

 

부친은 일본 니혼대 상과과 메이지대 법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동대문집이 3300평이고 당시 드문 캐딜락이 있었고 차 수리공이 1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식민시대 사업가이기에 일본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었고 백남준은 그런 점이 못마땅하게 생각해 평생 부친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내인 백남준은 결국 집안에서 말썽쟁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 백남준 부친 그를 홍콩에 있는 영국계 고등학교에 전학을 보낸다.

 

백남준 당시 예술적으로 쇤베르크게 심취했고 철학적으로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랬지만 맑스에 심취했다. 경기중학교 다닐 때 노자장자도 배우고 맑스도 배우고 당시 경기중에는 학생들마저 우익과 좌익이 있었고 백남준은 항상 우익동료학생들에 얻어 맞아 피를 흘리며 집에 귀가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를 꺼려했다고. 백남준 집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하여간 그런 와중에 그는 마침내 결심을 한다. 나는 굶어주는 한이 있더라고 형들이 다 사업가가 되었지만 자신은 예술가로 살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평생 무소유주의자로, 유물주의자로 살기로 결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