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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전시 행사

살아있는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같이 만나다

백남준아트센터에 가면 살아있는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를 만날 수 있다 
- TV(텔레)
토피아 제국의 황제 돌아오다 2010년3월13일-5월9일까지 백남준아트센터www.njpartcenter.kr 
- 2010년 백남준 상설전 전면개편기획전 신소장품 전시오픈닝행사에 다녀와서


백남준 I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1995 백남준이 말하는 백남준 


백남준이 로제타 돌의 형식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말하고 있다. 영어 불어 독어 일본어 한국어 등으로 쓰여있다. 그의 문장에서 누구도 하지 않은 말이 많다. 그리고 그의 한국어는 일제시대 양반들이 쓰던 한국어 투가 많다. 짧고 투박하지만 독창적이고 유머와 위트가 넘치다. 그는 누구가 말하지 않는 신은 죽었다와 같은 니체 풍의 언어로 그득 넘친다. 하지만 그의 한국어는 반말투라 한국에 왔을 때 주변사람들은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로제타석을 더 가까이서 찍은 것이다.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은 처음 본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는 1963년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 첫전시회에서 사용된 혁신적 개념으로 그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키워드다. 샤머니즘적 유토피아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무질서의 세계 속에 전혀 뜻밖의 인연이나 만남 혹은 그에 걸맞는 환희를 말한다 

백남준이 생각하는 별자리(성좌) 

이영철백남준아트센터관장과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실장 토비아스 버거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 서로 호형호재하듯 이영철관장과 토비아스 버거 학예실장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남준의 동서의 비빔밥정신이 여기에서도 구현된 셈이다. 참으로 보기 좋다. 백남준은이렇게 동서가 서로 편견없이 이유없이 평화롭게 만나는 중개자역할을 했다. 이렇게 백남준아트센터에 가면 살아있는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를 만날 수 있다. 

Tobias Berger, born in 1969 in Wiesbaden. After graduating in art history and economic science from the Ruhr-University Bochum(1991~1998), Berger completed the DeAppel Curatorial Training Programme in Amsterdam in 1998/1999. He then worked as a curator at the Museum Fridericianum in Kassel until the end of 2001, where he was responsible for a number of exhibitions including 'Change is Good(1999/2000)', 'Flexibilitätsversuche(2000)' and 'German Leitkultur(2001)' 


백남준 왈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My Jubilee Ist Unverhemmet)" 다시 말을 고쳐쓰면 나의 환희는 훨훨 불타고 철철 넘친다는 뜻인데 이는 인생은 표현한 만큼 행복하다는 것은 백남준식 어법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표현할 때 인간의 최고의 쾌감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2010년 랜덤액세스전 포스터 

백남준의 부퍼탈 첫 전시회에 등장한 소머리는 이것은 동양인작가가 서양인 기를 꺾는 일생일대의 전략이었다. 그것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하긴 우리에게는 아주 흔한 일로 하나의 문화다. 새로 문을 여는 제례나 행사에 돼지머리가 빠지던가 언제 어디서난 보는 일지만 그들에게 이런 것이 아주 낯선 것이었을지 모른다 


백발의 어르신은 백남준예술의 비밀이 뭔지를 캐기위해서 전시장 입구에 전시물에 골몰하고 있다. 

[미술관자료] 비디오가 지루하고 TV가 형편없는 단 하나의 이유는 시간에 매여 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녹화와 정보 횟수 시스템에서 시간에 매여 있는 정보를 잘 다루는 기술을 터득하지 못했다... 임의접속과 비디오를 접목하는 작업은 우리가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비디오 분야에서 녹화테이프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은 테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디지털화해서 전자 종이에 기록하는 방법을 연구 중인데, 이렇게 되면 임의접속이 조금은 가능해지지 않을까?... 비디오의 '위대한 예술' 비디오는 비디오 설치 형태로 소개될 것이고, 일정한 유형의 예술 작품들을 '운송'할 수 있는 일종의 표기법이 개발될 것이다... 21세기 젊은 음악가는 일련의 사진과 표기법을 기준으로 캠퍼스의 비디오 설치를 '해석'하게 될 것이다. (백남준, 1980년 뉴욕 현대미술관 MOMA 강연 '임의 접속정보'중) 

타임스에 난 백남준 정보고속도로에 관련 표지기사 


백남준은 횡단하는 길과 관련된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래서 전자초고속도로와 베니스에서 울란마트로까지라는 발상을 한 것이다. 몽골의 이런 전승을 자신의 비디오아트에 적용시켰다. 


백남준이 예언한 전자고속도로에 관련된 자료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 1993  

백남준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작이다. 이밖에도 다른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는 그해 인터뷰에서 예술은 놀면서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논다는 말을 예술을 창조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는 인류가 탄생한 이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백남준과 TV모니터 그리고 최소의 TV인 달 

달은 몽골 칭기즈칸에게 밤에 영토를 점령하는 좋은 등대와 같은 것이었다. 백남준은 그래서 달에 홀렸다. 

백남준은 모니터를 달로 보았다. 그는 달에 홀린 피에로다. 
달에 홀린 피에로(Pierrot Lunaire)는 원래 벨기에 시인 알베르 지로(Albert Giraud, 1912) 시이다. 여기서 몇 구절만 소개한다. 

인간이 눈으로 마실 수 있는 술을 
넘치는 바다불결 위에서 달을 
그리고 봄날의 조류가 폭음한다 
지평선 위에 넘쳐 흐른다 

무섭고 달콤한 욕망은 
수없이 물결을 가른다 
인간이 눈으로 마실 수 있는 술은 
넘치는 바다물결 위에서 달은 폭음한다. 

기도하려는 시인은 미친듯이기뻐하며 
그 신성한 영조주에 취해 있다 
그는 취한 채로 하늘을 향해 
무픕을 어지럽게 비틀거리며 
눈으로 마시는 술은 거침없이 들이킨다 

천국과 지옥이 없는 
오직 저 푸른 하늘만 
모든 사람을 위한 
오늘을 위해 사는 세상 

국경 종교 없는 
탐욕 궁핍 없는 인류애만 넘치는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 1993 

백남준의 기계의 인간화를 추구했다. 백남준이 만진 기계는 사람이 되어 호흡을 하게 된다. 
백남준은 기계를 사람으로 만드는 조물주인 셈이다 


백남준은 자신을 한국인이기보다는 칭기즈칸으로 생각했다. 전 세계를 누비는 유목민 그는 정말 5개국어를 하는 문화의 칭기즈칸으로 살았다. 시공간의 장벽을 허물고 동서문화을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은 셈이다. 그의 소화력은 왕성했고 그의 스케일은 날로 커져갔다.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 1993  

이게 백남준이 생각하는 유목민이다 이 세상의 모든 비전을 자전거에 싣고 지구촌을 떠도는 방랑자 그는 여기서 우주를 보고 인류와 대화하는 자 즉 소통과 참여의 미학을 낳았다. 그는 황제로 호령했으나 지배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상상력의 자유를 최대로 열어주었고 표현에 대한 일체의 억압과 권위에 도전하고 이것과 싸우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이 지도는 백남준이 유목민으로 떠돌이로 다닌 흔적이 그려져 있다 


백남준의 트레이드마크다. 그의 프레임이기도 하다 모니터를 종이처럼 써먹은 사나이다. 비디오를 종이로 볼 수 있는 안목 하긴 우리나라 문풍지는 비디오처럼 생겼다. 그런 상상력이 모니터를 종이로 보게 한 것인가. 

칭기스칸이 남긴 대법령 

제3조 고의로 거짓말한 자 마술을 부리는 자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본 자 남의 싸움에 개입하여 고의로 한쪽편을 두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10조 탁발승 이슬람성직자 의사 법관 학자 수도사 장의사는 조세와 부역을 면한다 
제11조 모든 종교를 차별없이 존중해야 한다. 종교란 신의 뜻을 받든다는 면에서 모든 같다. 등등 
제31조 서로 사랑하라 간통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위증하지 마라 모방하지 마라 노인과 어린이를 돌봐라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 1993 

여기 로봇은 정말 살이있는것 같다 

백남준의 첫전시회가 열린 부퍼탈 파르나스화랑을 최근 찍은 사진 

파르나스는 예술의 신전을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고, 그 여동생인 아르테미스는 달의 신이 되었는데, 이 또한 일월을 상징한다. 아폴론은 태양신이 되면서,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내리는 신이 되었다. 재미난 점은 델포이 신전이 있는 산의 이름이 파르나스(파르나소스) 산인데, 이 산은 훗날 프랑스 파리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이 되었단다 

백남준 i 문학은 책이 아니다 1988 

미술은 미학이 아니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등으로 패러디할 수도 있다. 

이승택 작품과 오방색 계열의 색동미학 

1. 랜덤 액세스 비상업적: 작품을 만들어 돈 받고 파는 행위를 배격함. 작품은 그냥 작품으로써 끝날 뿐 거기에 금전적인 가치가 붙는 것을 용납치 않았으나 이런 철학에 기반한 백남준을 비롯한 플럭서스 작가들 작품은 오늘날 수천 수 억원을 호가함-2. 재미: 대중성과 재미는 백남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 예술 작품에서 심각한 사상이나 철학을 배제하고, 오직 예술가 자신의 재미와 변덕, 즉흥성에 의해 작품을 창조함. 

3. 전통과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 그는 서양 전통 사상이나 예술에 철저하게 저항한 인물로, 평생 서양이나 동양 미술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오직 자기 중심적인 아이디어에서 작품을 생산함.-4. 유목적 다양성: 백남준에겐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이라는 별명이 있음. 한국, 일본, 홍콩, 유럽, 미국 등 이곳 저곳에 살면서 요란하고 다양한 개성을 미술 작품에 투영하는 것으로 유명 - 다음 지식에는 어느 분이 백남준의 특성을 이렇게 정리했네요 

TV 부처 

서양인에게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그러나 동양인에게는 선이 악이고 악이 선이다. 없음이 있음이고 있음이 없음이다. 이런 것을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즉 이원론적인 서양인이 이해하기 힘들다. 위에서 보듯이 TV와 부처를 같이 둔다는 것은 서양인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백남준은 이렇게 비밤밥정신 기계와 인간을 같이 두었다. 동양의 시세화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같이 두는데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서양인에게는 힘들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는 동양이 서양보다 한 수 위다. 

플럭서스전위예술패 

유럽의 기존의문화를 거부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문화패로 이차대전이전까지 유럽이 육체보다는 정신을 중시했다. 그런데 정신을 너무 강조하다보디 나치즘이 등장하자 이 문화패는 육체를 중시하고 몸으로 하는 퍼포먼스를 가장 중시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비디오아트가 생긴다. 몸이 정신보다는 맑고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 아닌가싶다. 몸을 아름다움으로 보지 않고 윤리적으로 보면 복잡해지는데 그런 요소를 완전히 제거했다 

백남준 첫 전시 1963 부퍼탈 

백남준은 독일에서 첫 전시회를 열때 제목이 추방전이다 1863년은 마네가 풀밭위에서 점심식사를 발표한 해로 서양미술사에서는 낙선전이 열리는 때였다. 그리고 낙선전과 백남주의 추방전 사이에 뒤샹이 개념미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보면 백남준은 첫 전시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인데 그것은 마로 마네를 살해하고 유럽미술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일종의 테러인데 여기서도 유럽인의 미의 원형인 뮤즈를 해체시켜버린다. 일종의 서양미술의 추방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입구 

이제 경기도는 백남준아트센터가 들어섬으로써 서울보다 더 중심지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문화센터가 들어선다는 것은 4대강 몇개를 건설하고나 발전소를 만드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경제적 효과가 높다. 여기에 오는 외국인은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많고 한국을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손님을 맞이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전시장 중 가장 활기찬 곳은 없을 것이다. 바로 백남준의 혼이 살아있는 곳 백남준이 사는 집이다. 그러니 그럴수밖에 없다. 그런 나는 환희로 불탄다고 하지 않았던가. 활기와 환희가 없으면 그것은 백남준이 사는 집이 아니다. 말말 백남준이지 죽은 곳이다. 


백남준은 5개국어를 했으니 다른 사람의 5배를 산 셈이다. 그러나 이것만 해도 그는 이미 500년을 산 것이고 그리고 21세기 500년을 미리 내다보기 있으니 합치면 1000년을 산 셈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역사에서 세계에 한국을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이다. 단군이래 백남준 같은 사람은 없다. 그 스스로 칭지스 칸 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가 한반도에 이전하기 전에 몽골의 유목민후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었다.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 1993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Yellew Peril C'est moi. 정말 백남준다운 말이다. 황색은 아시아인을 말하고 재앙은 서양문화주도권에 재앙을 내리겠다. 그의 첫 전시가 추방전 아닌가 서양미술사를 추방시키겠다. 엄청안 포부를 가진문화의 칭기스 칸 그것이 바로 백남준 그는 그게 바로 나야. 짐이 국가야(L'Etat c'est moi)하고 한 말과 급이 같다. 백남준이 쓴 바로 나야는 불어에서 가져왔다. 바로 루이 14세의 말을 여기서 그대로 인용했다. 당찬 포부다. 


이영철관장은 방문자들에게 여기서 서양의 비너스를 추방하기 위해서 마네킹을 해체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고 말하다. 서양의 뮤즈를 죽어버린 것이다. 역시 백남준답다 

전기와 소리로 모니터에 그림을 그리는 전자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그림이다. 여기에서 그런 전자영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소리를 영상으로 만드는 데 백남준은 천재적 능력을 발휘한다. 

백남준 아베 I K-456 

이 작품은 여러번 소개되었고 일본기술자 아베의 도움을 받아 그가 만든 로봇이다. 조물주는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로봇을 만들고 인간두뇌활동의 총결산이다. 앞으로는 어떤 로봇을 만드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랜덤액세스 

랜덤 액세스 이것은 불교의 개념이다. 그렇다가 아니다고 아니다 그렇다이다.이런 것을 서양인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서양의 물리학이 동양의 불교와 만나면서 이런 개념이 생겨났다.


백남준 자서전 

백남준다운  일성, 참으로 멋지고 통쾌하 그의 유머다 

"1931년 9월 31일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최고의 쾌락을 음미하는 동안 잉태되었다" 


TV와 부처처럼 코끼리 부처 TV 마차 전형적인 유목몽골의 모습이다. 남준은 항상 이렇게 떠날 준비가 완비되어 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유토피아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음악의 TV세상이다. 거기에는 축제와 상상과 창조와 환희와 행복이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 자체가 예술이다. 이런 것을 기록하다 비디오아트가 탄생하게 된다 


그의 작업실을 연상하게 되는데 그는 방은 마치 발명가나 과학자의 방 같이 보인다 


여기서는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참여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더욱 멋진 감상법이 된다. 


색동의 미학을 이렇게 잘 소화한 작가도 드물다 

백남준 I TV(비디오) 샹들리에 1번 1989 

[참여작가] 브루스 나우만, 타미 킴, 김민정, 박찬경, 임민욱, 최태윤, 양아치, 토마스 허천, 볼프 포스텔, 클레이톤 캠벨, 마사 콜번, 볼프 포스텔, 브루스 나우만, 스즈키 유리 등등. 

백남준 I '비디오 샹들리에 1번' 설치작품 1989 

백남준의 이 작품을 한국의 세계적 작가 이불은 흉내낸 것인가 이것은 TV로 만들 추상조각으로 인생을 다각도에서 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 

작퓸은 관객의 도움으로 완성된다 

최태윤 I '무대지' 

양아치 I '이젠.우린.충분히.그럼에도.불구하고.당당한.신세계인이다' 

작퓸은 관객의 참여로 완성된다 

양아치 I '이젠.우린.충분히.그럼에도.불구하고.당당한.신세계인이다' 2010 20분 

현대인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자신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없으면 인간을 사랑할 수 없고 작품을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원금이 있어야 이자를 만들 수 있다. 철학이 없는 학문이 불가능하듯이 정체성이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양아치 I '이젠.우린.충분히.그럼에도.불구하고.당당한.신세계인이다' 

타미 킴 I '5 인터-락트-큐터스 (대화자 + 갇힌)' 2010 

여기서 참여미술(interactive art) 정신이 반영되었다. 작품이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완성된다. 즉 작품은 과정(become)이고 관객이 참여하여 결과(be)가 된다. 그런데 그 be도 완성된 것은 아니고 무정형이기에 랜덤 액세스로 변할 수 있다. 


작가가 작품해설을 위해 모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민희 I '숲의 특징' 

이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랜덤 액세스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책은 순서에 관계 없이 아무데나 자유롭게 펴서 읽으면 된다. 오히려 순서대로 읽으면 혼란이 온다. 그만큼 작품의 역동성과 유연성이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이런 정신은 한국의 보자기와 병풍와 부채에서 볼 수 있는 랜덤액세스와도 통한다. 

지민희 I ''숲의 특징' 근접에서 찍다 

유리 스즈키 I '소리 따라잡기' 

글 백남준 엮은이 에디트 데커(Edith Decker) 이르멜린 리비어(Irmeline Lebeer) 옮긴이 임왕준 정미애 김문영 

이번에 백남준이 쓴 책이 한권 나왔다. 백남준에 관하 프랑스어로 된 책으로 한국의 불어학자 3명이 번역했다. 그에 대한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아트쇼핑센터. 물건을 꼭 사지 않아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백남준아트센터자료] 3월 13일부터 시작될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는 '랜덤 액세스 Random Access'는 1층의 완전히 새롭게 개편한 상설전과 2층의 기획전을 아우르게 된다. 전시 전체는 백남준의 '랜덤 액세스'라는 개념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전시로 확장시키고자 한다. 상설전에서는 '비디오 샹들리에', '달에 사는 토끼', '안데르쉬 컬렉션'같은 2009 신소장품이 선보이며 백남준 총서 '백남준의 귀환'을 토대로 기획 될 예정이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는 독일 컬렉터인 에릭 안데르쉬의 백남준 컬렉션 전부를 구입함으로써 컬렉션의 기초를 닦았다. 이 컬렉션은 1952년에서 1962년 사이의 '오디오테이프 릴'과 같은 초기작품과 오브제 뿐 아니라, 1963년의 '음악의 전시'포스터, 1964년 아헨 포스터와 같은 백남준의 초기 독일 시기의 가장 중요한 포스터와 다큐멘트를 제공한다. 또한 백남준의 오랜 친구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로부터 구입한 '머리를 위한 선' 퍼포먼스을 위해 백남준이 만들었던 첫 번째 리허설 족자 역시 새로운 컬렉션에 포함되었으며, 대형 설치작품으로는 백남준이 만든 첫 번째 비디오 샹들리에 '비디오 샹들리에 Nr.1, 1989'를 독일 TV 방송국으로부터 구입하다. 이 작품들은 새롭게 개편되는 상설전에 소개될 예정이다. 이 상설전은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여 감각적 체험으로 경이로움과 상상력의 자극받을 수 있는 환경안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환희' 와 '웃음', 그리고 '놀라움'으로 가득 찬 세계임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계속) 


백남준은 동서의 사람들을 모아 축제를 벌리게 한다. 백남준이전의 시대는 정신의 시대였다. 그러나 전후 독일에서는 정신주의가 나치즘을 낳았기에 육체주의 몸철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그렇게 미치도록 퍼포먼스를 했다. 포퍼먼스는 해프닝이라고도 하는데 해프닝은 해픈(어떤 사건이 일어난다)에서 생긴 말이다. 백남준이 가면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난다. 여기서도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카페테리아 

[...] 2층에서 개최되는 기획전 '랜덤 액세스'는 6가지의 백남준의 작품을 임의로 선정하여 그 작품과 연계된 6가지의 해석을 제시하는 기획전으로 백남준의 작품과 연계되는 현대작가 백남준, 브루스 나우만, 타미 킴, 김민정, 박찬경, 임민욱, 최태윤, 양아치, 토마스 허천, 볼프 포스텔, 클레이톤 캠벨, 마사 콜번, 볼프 포스텔, 브루스 나우만, 스즈키 유리 등의 작가의 작품이 선보인다. 2010년의 첫 번 째 기획전을 맞이하여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실은 여섯 개의 백남준의 작품과 글, '아헨 포스터, 1964', '랜덤 액세스, 1967-68', '사이버네틱 마니페스토 1966', 'Suite 212, 1975', '총체 피아노, 1963', '핸드 앤 페이스, 1961'를 임의적으로 선정하였고, 그 작품을 중심으로 새롭게 현대적 담론을 제기하는 전시이다. 따라서 이 전시는 백남준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의 작품이 현대 그리고 최근의 예술 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이기도 한다. 이 전시에는 이미 잘 알려진 작가와 새롭게 부상하는 작가의 작품이 병행되며, 각기 다른 여섯 개의 전시가 백남준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보여줄 것이다. 오프닝에 펼쳐질 양아치의 감시카메라 퍼포먼스와 최태윤의 드로잉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사운드설치와 비디오 등의 매체로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랜덤 액세스'는 도전적인 작품들로 흥미롭고 논쟁적인 전시가 될 것이다  [미술관] 

2010년 3월 프랑스지방선거 지도가 재미있네요 로이터통신 야당이 95% 승리했네요. 
선거 결과가 전혀 예상 못한 랜덤 액세스다.
 

[비디오아트로 동양화를 그린 박현기] 
- 갤러리현대 2010.03.09.-03.28 

갤러리현대 사간동 입구 

무제 모니터, 돌 설치 1978 

돌이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이다. […] 
돌 작업은 자신을 표현하고 서구과학의 한계를 느낀 우리 입장과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무제나무, 돌, TV 20 x 230 x 64 cm1993 

박현기는 백남준과 관계없이 한국에서 비디오아트를 독보적으로 이끌어갔다. 나무와 돌과 TV라는 삼요소가 유감없이 그 긴밀한 관계성을 유지한다. 그 긴장감이 관객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준다. 빛과 돌과 나무의 3위1체를 천지인처럼 이룩한 미학이다. 

무제 나무, 돌, TV 20 x 230 x 64 cm 1993 

돌과 나무의 관계성 남성과 여성 음과 양 모든 우주만물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 관계성을 어떻게 규정하는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TV & 돌 모니터, 돌, 가변 설치 110 x 300 x 90cm 1978 

TV가 돌에 둘러쌓여있다. 어둠 속에 빛이기도 하고 자연 속에 문명이기도 하고 돌 위에 TV로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서화를 같이 놓을 수 있는 동양적 공존과 화이부동의 정신은 현대문명의 답을 찾는데 좋은 상상력과 영감을 준다. 

무제 비디오 프로젝터, 돌 가변 설치1981 

현대미술의 특징은 가변성과 투명성 그리고 참여와 소통이다. 원시시대에는 굳이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종의 문명병인데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전위예술이 나선 것이다. 비디오아트도 그중 하나아다. 결국 문제는 소통과 참여다. 예술에 인간과 물질이 참여하는 것이 문제다. Interactive art가 키워드가 된다. 

폭포 비디오 프로젝터, 스크린 보드, 가변 설치 278 x 388cm (Screen)1997 

비디오로 그린 폭포 참으로 아름답다. 그 가변서으로 인해서 더욱 현대적이고 전위적이다. 색은 다양한 변주를 할 수 있다. 옛날에는 한장의 작품만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 변주가 백남준의 말대로 무한대인 것이다 

무제 

음양오행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방색은 다섯손가락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두손을 잡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데 그럼 면에서 10이라는 숫자는 중요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숫자에는 5가 있고 10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3이 있다. 서양에서 들어온 3위1체가 우리의 정서와도 잘 맞는다 그래서 천주교나 개신교가 대중화된 것인가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테크놀로지가 만나 서로를 반영함으로써,‘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를 완성한 것이다. 
- 정준모 미술비평가 국민대 초빙교수
 

TV 시소 모니터, 돌, 금속 40 x 270 x 72 cm 1984 

문명과 자연의 균형과 조화 그것을 시소게임에 비유했다. 그 상상력과 발상이 기성천외하다. 

박현기의 비디오와 오브제-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박현기는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하나의 성좌이자 동시에 미완의 과제이다. 흔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미미하고, 비디오 라는 생소한 매체를 다루면서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한 작가였지만 한국 비디오 아트의 개척자라는 맥락 없는 칭호만 부여받은 채 적절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기 떄문이다. 첨단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미디어 아트가 확산되고 비디오가 미디어 아트로 포괄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정례적으로 미디어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지만 그 역사를 연 그의 개별 작업에 대한 연구는 별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배경에서 금번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서울에서의 첫 회고전시는 작가 사후 8년 만에 대구광역시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던 첫 회고전 '현현'(2008) 이 후의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번 전시가 박현기에 대한 일반인과 연구자의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박현기는 1942년 4월 일본 오사카 태생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가 전공을 바꾸어 건축과를 졸업한 후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70년도 초반에 큐빅 디자인이라는 실내장식 전문회사를 경영했다. 당시 절친했던 이강소 등 대구의 미술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토론하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던 그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5회에 걸친 <<대구현대미술제>>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미술제의 중요성과 성과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예술의 도시 대구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는 전국의 주요작가들과 외국작가까지 참여한 프로세스 아트, 퍼포먼스, 비디오, 필름, 설치 등 현대미술에 대한 열린 미술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일찌감치 비디오 아트에 대한 관심이 배태되었고, 박현기가 비디오 매체를 선택하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작가 박현기 

[...] 그러나 박현기의 비디오 입문과정에서 백남준의 영향은 한정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비록 그의 작업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박현기의 비디오나 테크놀로지에 대한 접근 방식은 차라리 1970년대의 우리 현대미술이 추구했떤 오브제나 물성에 대한 관심과 동양사상, 그리고 서구적 근대주의의 초극과 부정(否定)의 미학을 내세운 모노하와 이우환의 철학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관계항>으로 통칭되는 이우환의 조각 작업들은 자연물인 돌과 인공물인 철판의 조합으로 구성되는데 그는 동양에서 돌은 자연을 지지하는 중심적인 형태인 한편 철판은 돌에서 뽑아내어 인간의 개념으로 추상화시킨 것이기에 자연성과 인위성을 고루 지닌 철판으로 돌과 인간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설명한 바 있다. 

[...] 박현기가 70년대의 많은 작가들처럼 모노하와 이우환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리고 오브제와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포스트미니멀리즘 작업에 연계되었다면 당시 일본 현대미술의 상황은 좋은 참고가 된다. 1970년 일본에서 열린 <<사람과 물질 사이 Between Man and Matter>>라는 제목의 ‘10회 도쿄 비엔날레’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관계를 다룬 국제전으로 서구의 주요 대지미술, 프로세스아트, 아르테 포베라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여기에 비디오 특별 섹션이 포함되었고 비디오 설치가 처음 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60년대 중반 소니 사가 첫 포터블 비디오 카메라를 생산하자 작가들은 일찌감치 화지(和紙)표현에 영상을 비추는 등 비디오로 작업하기 시작했고 70년대 초반에는 이미 비디오 작가 그룹이 형성되어 서구의 작가들과 교류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본은 해외 미술동향의 일차적인 정보원이었거니와 박현기가 이들의 활동을 알았는지는 확인이 불가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비디오, 오브제, 환경 등을 모두 다룬 이 전시는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영상자료 

그런데 백남준을 접하고 테크놀로지 아트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던 박현기는 곧 실망하여 테크놀로지로 비디오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테크놀로지 환경 경험이 없었기에 그를 추종할 수 없었고 반대급부로 탈테크놀로지한 장르를 지향하기로 결심하고 우리식으로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라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해서 우리의 영상, 과거의 영상을 찾아 돌무덤, 선돌, 땅굴을 헤매고, 흐르는 물 모두가 영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연못과 강물, 낙동강변을 작업 무대로 삼아 실험적 시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박현기는 탈테크놀로지적인 정서로 로우테크 비디오 작업을 하게 되고 돌과 TV 모니터를 병치시키면서 돌파구를 찾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은 테크놀로지 아트인 비디오를 서구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사용한 정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비디오의 기본 요체인 시간차 피드백이나 자기반영, 공공 다큐멘터리나 편집기능 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익명적인 시선으로 실물과 일루젼, 실재와 재현, 자연과 인공의 생경한 조합과 충돌을 강조하는 작업을 자신의 본령으로 삼게 된 것이다. 

[...] 1980년대에도 그의 돌 사랑은 변함이 없어서 커다란 바위의 표면을 스크린 삼아 돌들의 이미지를 비추거나 전시공간을 떠나 자연 속에 비디오 돌탑이나 모니터를 설치했고, 후에는 돌탑의 구성을 바꾸어 모니터의 수를 돌보다 더 많아지는 작업도 내놓았다. 81년의 <도심지를 지나며>는 거울을 부착시킨 대형의 인조 돌을 트레일러에 싣고 대구 도심을 통과하면서 시민들의 반응을 촬영, 전시장의 모니터에서 재생했는데 이는 그의 작업의 어휘가 확장되는 것을 말해준다. 1990년대에 모니터와 돌이 결합된 작품으로는 소위 ‘나무 손’ 시리즈(1991-93)가 있다. 장방형의 폐침목을 손가락처럼 자르고 그 사이에 돌들을 끼워 넣어 벌리고 소형 모니터를 부착해서 스스로 이 작품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업은 변형된 비디오 돌탑이자 평생 오브제와 모니터, 그리고 돌과 그 이미지를 결합해왔던 그의 최종적 자화상처럼 보인다. 


사망 전의 마지막 10년이 되는 1990년대에는 정적인 돌탑 작업에서 벗어나 프로젝션을 활용한 작업들이 등장했는데 <우울한 식탁>(1997)은 제목대로 식탁위에 놓인 대형 접시에 자신의 몸에서 떠낸 석고 조각을 올려놓고 그 위에 광주사태나 4.19 혁명의 다큐멘터리 클립을 비춘 드물게 정치적인 작품이고, 그 밖에도 미국 골동품 가게에 구입한 붉은 옻칠이 된 원통형의 제기 같은 용기 위에 정적인 만다라 이미지에 포르노 동영상을 비춘 <만다라>(1997), 스크린 보드 위에 쏟아져 내리는 물의 이미지를 비춘 <폭포>(1997)나 흰색 대리석 위에 물결 이미지나 계곡 옹달샘에 비친 자연의 이미지를 옮겨놓은 <현현>(1999) 등이 주목할 만하다. 박현기는 만다라는 원래 ‘시간의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변화와 움직임을 뜻하는데 강렬한 색채와 신비한 종교적 이미지에 끌려 이를 속도와 색채와 기하학의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술회했는데 그의 생애가 짧게 마감되지 않았다면 그의 비디오 작업의 어휘는 더욱 세련되고 다양해졌을 것이 틀림었다. 

이상 한정된 지면에서 박현기의 작업을 비디오 중심으로 개괄해보았다. 당초 비디오를 테크놀로지 와는 무관한 쪽으로 몰고 간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사물을 관조하는 명상적이고 초월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개성 넘치는 작업들을 낳았는데 이는 비디오 매체의 서사성이나 연극성을 거부한 대신 오브제나 사물의 본성이나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투철한 탐구와 각성의 경지를 담보하는 성과로 보상되었다. 후기의 프로젝션 비디오들 역시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이는 비디오의 기본적인 속성을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인 고집의 결과이다. 그는 비디오를 통해 전통과 우리 것을 고수하고자 애썼거니와 이들은 엄밀히 ‘한국적’ 비디오이기 보다는 ‘박현기적 비디오’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 아트의 외로운 선구자로 남아있지만 그가 척박한 땅에 쌓아 올린 비디오 탑은 그래서 오늘 더욱 굳건하고 드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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