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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30대 (1962-71)

[백남준] '러셀 코너' 추상화가 백남준 만나고 나서 180도로 바뀌다'

<러셀 코너 추상화가 백남준 만나고 나서 180도로 바뀌다>

 

러셀 코너(R. Connor Whitney Museum of Art의 교육 책임자. 아래 왼쪽)는 1969년 보스턴에서 미디어 비전가인 남준을 만났을 때,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던 추상화가였다. 코너가 어느 날 밤, SAAM의 McEvoy Auditorium에서 열린 백남준의 생일(1932년 7월 20일, 한국 서울에서 태어남)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에서 말했듯이, 그 만남은 코너의 삶을 바꿔 놓았다(코너는 그것을 "마음을 흔들고 삶을 바꾸는" 만남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예술도 바꿔놓았다. 코너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전과 이후의 이야기"라고 불렀다. 백남준 이전의 삶은 코너에게 다소 지루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예술적 나침반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놓았다"고 한다. 그는 추상화가였지만, 자신의 작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고 느꼈다. 백남준과의 만남과 협업 이후, 코너의 나침반은 새로운 예술적 비전으로 바뀌다.

Connor는 남준을 "황야에서 더 황무지"로 데려간 "구세주"라고 불렀다. 저녁이 시작될 무렵, 우리는 남준이 제작하고 Connor가 그의 뛰어난 깊은 목소리로 내레이션한 실험적 비디오 클립 몇 개를 감상했는데, 여기에는 1973년의 Global Groove가 포함되었다 . "이것은 미래의 비디오 풍경을 엿보는 것이다." Connor가 시작했다. "그때는 지구상의 모든 TV 방송국으로 전환할 수 있고 TV 가이드는 맨해튼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울 것이다." 또 다른 비디오인 The Selling of New York 에서는 Connor가 음악가 Charlotte Moorman과 함께 출연했는데, 그녀는 남준이 그녀를 위해 디자인한 TV 브라를 입고 첼로를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 Connor는 Brandeis University의 Rose Art Gallery에서 첫 번째 비디오아트 전시회를 개최하여 떠오르는 매체에 대한 그의 중요성을 확고히 했다. 그 시점부터 그는 Paik뿐만 아니라 William Wegman, Bill Viola 등과 함께 TV용 영화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Whitney Museum of Art의 교육 책임자가 되었다.

Connor는 자신의 작업 측면에서 Chroma Key(현재는 Green Screen으로 알려짐)라는 텔레비전과 비디오 아트에서 배운 효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배경을 대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추가할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매시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냈는데, Connor의 작업에서 서로 다른 그림 속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만났다. 예를 들어, 그가 Love and Death 라는 제목의 한 그림에서 Manet의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주제가 만났다. Dead Toreador가 Olympia의 침대 아래에서 나타났다. 이 작품과 다른 작품에서 Connor는 자신의 예술적 나침반을 찾았다. // Connor는 강연을 마치며 젊은 예술가들에게 조언을 하나 했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남준은 아주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아냈다. 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저는 우리가 그 길고 구불구불한 길에서 서로를 도왔다고 생각했다." 강연이 끝난 후, 청중은 파이크의 생일을 축하하는 생일 케이크와 음료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