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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30대 (1962-71)

[백남준] 비디오아트, '반전사상'과 '반체제'와 '신기술'에서 시작 비디오아트는 '반전사상'과 '반항적 반체제정신'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확장된 지각에 대한 '유토피아적 욕망'에서 시작했다.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 간행 '20세기 미국미술사'를 정리한 현대미술과 문화 1950-2000 > 중에서 세기 미국미술사> [비디오아트, 영화, 그리고 설치 1965-1977] 비디오아트는 1960년대 미국 반체제 문화의 세 가지 경향 속에서 탄생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확장된 지각에 대한 유토피아적 욕망, 반 베트남전과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인 민권 운동, 주류 텔레비전의 제도적 권위에 대한 반항심이 그것이다.  60년대 중반 태동기부터 비디오는 세 방향으로 발전했다. 1) 환각적으로 굴절된 이미지 프로세싱, 2) 정치화한 공동체 행동주의, 3) 퍼포.. 더보기
[백남준] 진중권이 본 그의 '미디어 아트'론 - 백남준아트센터 진중권이 본 백남준 '미디어 아트'론 요약> 2010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01. 비디아와 비디올로지(videology)는 백남준의 예술적 신앙고백. 비디아(videa)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에서 유래하다. // 02. 비디올로지(videology)는 도상학(iconology)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다. // 03. 구텐베르크 종이시대의 종언을 선언하다. 이제 더 이상 역사는 없으며 영상물과 비디오물이 있을 뿐이다. // 04. 백남준은 낮은 해상도와 노이즈로 승부를 걸다. // 05. TV는 모든 기술적 오작동을 통해 TV아트가 되었다(인터넷 되다) // 06.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명제를 실천하다. // 07. 랜덤 액세스*(비정형-비연속-비결정주의 개척)-1963 선형성의 파괴, 소음의 .. 더보기
[백남준]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유럽인에서 한국인으로 [1962년까지] 백남준 30살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백남준 아니라 유럽인(쇤베르크, 존 케이지, 플럭서스)이었다. 여기에 한계가 있었다.[1963년부터] 백남준 31살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유럽인 아니라 백남준이었다 그런 면에서 1963년 세계미술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다. 이제 드디어 백남준 나서다.  1953(도쿄대 재학 쇤베르크 논문구상)-1963(첫 전시 TV)-1973(인터넷 유튜브)-1983(위성아트)-1993(베니스 황금사자상)-2003(호랑이 살아있다/뉴욕회고전(뉴욕을 점령하다)/록펠러센터 앞:레이저아트) 더보기
[백남준] 1965년 연설하는 <인간화(휴먼화)된 로봇> 제안 백남준은 21세기 로봇 전성시대를 미리 내다보고 거기에 따르는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1965년 인간화(휴먼화)된 로봇> 제시하다. 백남준 첫 로봇 K-456는 똥도 싸고 모차르트도 연주하고 케네디 대통령처럼 연설도 한다. 출산 절벽 시대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은 불가피하다 //  로봇을 개의 모양으로 만들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로봇을 인간의 모양(휴머노이드)에 가장 가깝게 만들 때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양한 일반폰이 하나의 스마트폰이 발전하듯이 / 로봇도 바로 모든 로봇 기능하는 종합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백남준 1965년 창안하다)으로 나아갈 것이다 / 자판 입력이 아니라 말로 물으며 말로 대답하는 챗 시대가 로봇 시대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더보기
[백남준] 운이 좋은 사람 그러나 실은 실력과 노력 있었다 1963년 백남준 첫 전시가 열린 파르나스 갤러리(독일 부퍼탈 ) / 소리에 예민한 광인 작가 / 뒤에서 이 전시 장소를 제공해준 건축가 '예를링 박사'가 아버지처럼 흐믓하게 백남준을 쳐다보고 있네요. 백남준 이렇게 속삭인다 "화창한 날에 라인강의 물결을 세어라 / 바람 부는 날에 라인간의 물결을 세어라" 더보기
[백남준] 호형호제하는 보이스, 어떻게 예술무당 되었나 요셉 보이스는 어떻게 '무당 예술가(shaman-artist 현대미술의 무당)'가 되었나?독일의 전후 예술가인 Joseph Beuys는 고대 샤머니즘 관습과의 연관성으로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왔다.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그는 자연, 동물, 인간의 원시 과거 및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깊이 연결된 수수께끼의 무당 인물로서 대중적 인물로 기성화되었다. 그는 이상한 공연, 의식, 교육 관행을 통해 이러한 주제를 자신의 예술에 통합하여 "현대 미술 의 무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 이후 예술을 통해 치유, 변화, 재생 의 메시지를 장려했던 보이스가 채택한 샤머니즘의 핵심 주제를 살펴보자 https://www.thecollector.com/how-joseph-beuys-become-.. 더보기
[백남준] "너 서양 미술 다 죽었다" 내가 "황색 재앙"이다 "예술은 죽었다" 1963 - 백남준 / 백남준 1956년 독일에 처음 도착 자신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한중일 동양어 3개국어와 독불영 서양어 3개국어를 안다고 / 그는 한국의 문화 칭기즈칸으로 서양애를 기를 팍 죽이다.  서양 미술은 죽었다 / 서양 미술 너 나한테 죽었다 / 내가 황색 재앙이다 / 내가 문화 칭기즈칸이다 /   듣도 보도 못한 전혀 새로운 완전히 혁신적인 예술을 하기 위해서 서양 미술판에 싹 쓸어버리다 / 서양 미술의 운동장을 다 물청소하다 / 서양 미술의 잔해와 전통과 유산을 완전히 제거시키다 / 고기 먹을 때 판을 바꾸듯 세계 미술의 판(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갈아엎어 버리다 / 그런데 그게 한번에 가능할까 그럴 때 백남준이 들이댄 것이 바로 TV다 비디오아트다.. 더보기
[백남준] 인간이 시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길이 뭔지 고민 [백남준은 인간과 시간과 공간(천지인)에 문제에 대해서 늘 고민했다. 특히 인간의 시간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떻게 하면 시간에 갇히지 않고 시간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가? 이걸 예술로 표현했다. - 비디오아트가 시간 베이스 예술이 된 이유다(?) 그의 시각예술에서 음악이 중요한 이유인가?]내가 나름 10년 그 이상 백남준에 관심을 두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사상의 초입에도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의 세계는 아무리 캐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진다.  그래서 그의 예술세계는 항상 흥미롭다. 절규로 유명한 '뭉크' 같은 예술가를 이해하는데 하루면 되지만, 백남준은 이해하는 데는 천년이 걸린다(?) 그래서 30세기를 예언한 밀레.. 더보기
[백남준 ] 1963년 '참여TV', 1965년 '자석TV', 소통 가능성 1백남준 참여TV는 백남준이 1963년 첫 개인전에 선보였던 13대의 TV(백남준 13가지 종류의 시간을 동시에 보여주다) 중 하나였다. 관객이 마이크 앞에서 소리를 내는 퍼포먼스로 작품에 참여할 때만, 텔레비전의 화면에 빛의 선들이 어지럽게 나타난다. 백남준은 텔레비전 내부 회로를 조작하는 기술을 통해 텔레비전 화면을 임의대로 바꾸고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백남준은 이러한 비디오아트가 해프닝과 퍼포먼스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 주었다고 평가했다. 텔레비전과 같이 이전에는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새로운 미디어와 기존의 예술을 만나게 하는 것, 이를 통해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대담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더보기
[백남준] 첫 전시 개념 18개 중 하나, 'Objet SONORE' [1] 백남준 7년간 준비한 첫 전시(독일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 1963년 3월 11일부터 3월 20일까지) 뒤샹과 차별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개념미술가로 16가지 새로운 현대 미술 개념을 첫 전시 포스터에 적어 놓았다. 그중 하나가 objet(뒤샹 개념) sonore (음악의 전시, 백남준 개념)이다. [2] 음악을 전공한 백남준은, 전자 미술(페인팅)로 전시를 하면서 TV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악 미술가가 아닌가. 미술과 음악을 비빔밥처럼 비벼버린 장본인이다. 서양 사람에게 기절초풍할 일이다. 그들은 한반도 생각해 보지 않는 발상이다. 이 또한 서양에서는 전혀 새로운 실험 미술의 출발(5차원 사기)인 셈이다 [3] 1963년 백남준 첫 전시 개념 18개 중 왼쪽 3번째인 가 있다... 더보기
[백남준] 서구미술의 우월주의 한 방에 날리다 피카소보다 한 수 위 뒤샹, 뒤샹 보다 한 수 위 백남준 ​ 카라바조와 그를 모방한 네덜란드 등 유럽의 작가들 그리고 피카소도 마찬가지다. 뒤샹이 서양의 회화전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레디-메이드를 만들었다는 면에서 위대하다. 그런 면에서 피카소보다 한 수 위다. 그러나 뒤샹도 백남준에 비해서는 한 수 아래다. 백남준이야말로 세계미술사에서 진정한 창조자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듣도 보도 못한 전혀 새로운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것이다. 그리고 유튜브와 인터넷과 SNS 소통방식의 시대를 열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핸하르트'는 백남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미술 평론가 진중권은 세계 미술사적으로 볼 때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 더보기
[백남준] '비디오아트' 탄생은 목숨 건 '15,000 볼트' 위험 ''난 1961년부터 시작한 전자공부를 매우 즐겼고 1만 5천볼트의 전기로 작업을 하면서 생명의 위험도 얼마간 즐겼다. 내가 미국인보다 2년 앞서 트랜지스터의 원리를 발견한 천재적인 아방가르드 천재공학자 '우치다 히데오'(우치다 라디오 리서치 연구소소장)와 과학이 논리보다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아는 전능한 기술자 '아베 슈아'같은 훌륭한 동료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현재 우치다 히데오는 전자기술적으로 텔레파시와 예언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다" - 백남준"15000 볼트의" - 백남준  백남준 첫 전시를 하기 전부터 비밀방을 만들어 전자공학을 독학으로 하다. 그는 독서광이었기에 어디에서나 책을 읽었는데 비밀방을 만든 것은 거기에 가서는 전자공학 책만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10대 때 .. 더보기
[백남준] 1963년 'TV아트' 창시,1969년 '신디사이저' 발명, 1973년 '유튜브' 예언, 1974년 '인터넷' 착안 백남준 독일에서 미국 뉴욕으로 넘어가는 시기 1957-1974년 20여 년 치열한 도전 속에서 천재의 불꽃을 피우다 [1] 백남준 독일시대 : 1957(1956년 말)~1963년 7년간(독일대학 수업 관심 없었고, 독일 대학교수들 우습게 보다, 아예 대학을 차버리다시피 하다. 전위적 실험예술가들(존 케이지, 슈톡하우젠, 플럭서스 회원들과 놀다) 이 독일 수업시대 전자공학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지난한 고생과 어려운 진통 끝에 하다. 이때는 유학비를 집에서 보내주었기에 굶지는 않았다 [2] 백남준 뉴욕시대(1964년 뉴욕 도착) 중 : 1968~1979년 11년간 '벨연구소'를 다니면서 '미래사회 4차산업시대 대비하는 리포트를 쓰는 중 (중간에 록펠러재단 기금도 받다) 1969년 유튜브가 가능한 시디사이저(.. 더보기
[백남준] 신디사이저 발명 후, 다빈치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신디사이저를 발명하고 나서 앞으로 유튜브가 나오면 이런 화면 조정이 가능하다고 예언하다. 1969년 제목 Versatile Color TV Synthesizer (1969) : This will enable us to shape the TV screen canvas. : As precisely/as Leonardo//As freely/as Picasso//As colorfully/as Renoir//As profoundly/as Mondrian//As violently/as Pollock//As lyrically/as Jasper Johns. //Versatile Color TV Synthesizer(1969) : 이를 통해 TV 화면의 캔버스를 형성할 수 있다. :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 더보기
[백남준] 사이버네틱스 아트: 자연과 기계와 인간의 위계를 허물다 1984년 1월 1일 위성아트를 통해 전 세계 속 시간과 공간의 대한 경계가 무너뜨리다(1963년 첫 전시에서 음악과 미술의 경계도 허물었듯이). 시공간에 대한 장막을 부수는 저항가로서 확실한 21세기를 보여주다. 비디오 디지털(뉴미디어) 항로를 열다. 1984년 1월 1일은 오늘부터 21세기 시작된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 자연과 기계와 인간의 위계를 허물다 이걸 사이버네틱스 아트(사이버아트, 신매체, 유튜브, NFT, 메타버스 아트 등)라고 부르다 / 백남준은 서구미술의 살해자 파괴자 그래서 동서미술의 위상을 5대 5대로 만들다 / 서양 중심의 룰과 고정관념을 깨고 항상 플럭서스(흐르는 물)처럼 가변성(Mobile)을 중시하다. 여기에 백남준의 변화무쌍하고 유연한 유희의 정신과 엔터테인먼트 요소와 유.. 더보기
[백남준] 1968-1979년 '인터넷(정보초고속도로)-유튜브' 착안 [아래 사진 백남준 1968-1979년까지 작성하는 모습 이 당시 백남준 제대로 먹지를 못해 영양실조(1964-1974)에 걸리다. 그만큼 힘든 시기였다] [PART 2 Transforming Video and Television: Media Art Practices] 백남준은 TV와 비디오 매체를 미디어아트라는 신 예술의 탄생을 가능하도록 변형시키다 // 뉴욕 소호 자택에서부터 위성 송신 무대까지, 예술에 대한 백남준의 강렬한 인본주의적 탐구는 인간의 정신을 알리고 즐겁게 하며 고양시킬 수 있었다. // 이를 위한 그의 70년대 노력은 Rockefeller Foundation 및 WNET의 Television Lab과 같은 기관의 지원을 받았으며 Shuya Abe, Allan Kaprow 및 Allen.. 더보기
[백남준] '알타이(유라시아) 연합국가' United KOREA [알타이(유라시아) 연합국가] 남북연합한국 United KOREA(남북철도 당연 포함)+동몽골+남시베리아+헝가리 등등. 백남준의 1960+70년대 생각, 김대중은 80+90년대 생각 백남준 I "지도의 우화(Map Allegory from Crimea to Korea)" 불난 곳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남부 크림 반도다. 1960년대 백남준과 보이스, 에 대한 유토피아를 가지고 있었다. 더보기
[백남준] 초기 그의 급진적 아이디어, 지금 세계 표준 되다 [1] 백남준에게 스크린은 감시와 중독이 아니라 놀이, 연결, 고급스런 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국제적인 창조적 협력과 발견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계화-동기화된 미디어 작동을 예측했고 참 비전을 제시하다. [2] 이번 전시는 백남준이 얼마나 최첨단에 있었는지 인식하기 위해 약간의 문화적 회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그 당시 급진적인 것이 지금은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제 동시 방송, 엔터테인먼트와 정치의 결합, 공연과 논평, 영화의 아이디어 또는 TV는 어디에서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예술 형식이다. - 영국 가디언지 Nam June Paik review – encounters with a true visionary A teeming retrospective of the Korean-Am.. 더보기
[백남준] 텃세 심한 서구를 희롱한 희대의 '교란자' 아래 사진 뒤로 쾰른 성당이 보인다. 맑스가 젊어서 여기서 기자생활 했다. 백남준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의 언어는 황당무계함의 집합이다. 예컨대 "예술은 사기다" "애국하면 망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의 담긴 진실을 이해하기 힘들다. 어찌 되었든간에 그걸 밋밋하고 싱거운 순수예술보다 톡 쏘는 짜릿한 양념이 들어간 예술 선호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웠다면 백남준은 45년을 타지에서 버틸 수 없었다. 그가 세계주의자가 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다.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이 애국이라고 봤다.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 서구에서 희대의 교란자로 살아남았다. 미국작가 앨런 말리스는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난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 이기에 그와 예술적 자유를 놓고 견주려 한다면 큰 오산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 더보기
[백남준] 독일 가서 서양미술 대혼란에 빠지게 하다 "백남준은 선의 철학을 괴벽스럽게 때로는 농담 투로 전자아트에 적용하기로 유명하다" -하버드 대학교 시각 예술과 교수,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 // [평] 맞는 이야기다.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을 적용했다. // 음악을 미술로, 미술을 음악을 표현하다. // 즉 음악과 미술을 뒤섞은 비빔밥의 미학이다. 독일의 바그너가 이탈리아에서 독립적 미학을 만들면서 내놓은 총체예술(Gesamtkunstwerk) 즉 통합적 예술양식인가 더보기
[백남준] "내가 TV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괴츠 교수 덕분"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대화는 더 풍요로워진다.’ - 백남준 그의 불확정성(예술이란 사실 아무도 가보지 않고 시도하지 않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을 거는 것이다. 잘못 가면 죽을 수도 있고 길을 헤맬 수도 있다 백남준이 TV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엽기적이다 - 조가연 조선대학교 대학원 논문 중 일부 발췌 백남준에게 TV로 예술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사람은 바로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 1959년부터 1979년까지 뒤셀도르프 미대교수)'였다. 백남준은 “그가 그때 컴퓨터페인팅 얘기를 했어요.”라고 기억했다 // 백남준은 스쳐지나가듯 괴츠가 문제로 지적한 전자TV의 카오스적 상태를 존 케이지식의 리듬 구조로 수용했을지도 모른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괴츠.. 더보기
[백남준] 아버지 '장 피에르 빌헬름'와 영감 준 '칼 오토 괴츠' 백남준은 예술 분야에서 불확정주의를 탐색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방법을 발견했다. 예술분야에서 ‘불확정주의에 대한 탐색’은 존 케이지의 영향을 시사하고, ‘탐색 방법에 대한 발견’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시사한다. 존 케이지의 『과정으로서 작곡』과 칼 오토 괴츠의 ‘브라운관 실험’은 백남준의 음악적 사유에서 연결되었고, 새로운 예술형식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장 피에르 빌헬름은 “괴츠의 이론 체계와 케이지의 음악에서 백남준이 이끌어낸 결론”이라고 표현했다. 백남준은 전시 서문에서 가장 먼저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386) 장 피에르 빌헬름도 전시 서문에서 “17년의 기간 동안 괴츠가 구축한 이론 체계에 백남준은 아주 많은 것을 의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 더보기
[백남준] 이게 진짜 혁명, 1963년 그가 일으킨 미술 혁명 이게 진짜 혁명이다. 1963년 백남준이 일으킨 미술 혁명이다 // 전자 아트 '전자 붓' 개념이다. '물감 붓'과 '전자 붓' 차이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TV 모니터에 수직선과 수평선을 그리다 [쇤베르크-칸딘스키-백남준]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의 3개의 피아노 소품을 듣고 // 감동해 이렇게 말했다. // "쇤베르크는 우리에게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 들려주었다. // 이것이 바로 미래의 음악이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그야말로 불협화음의 극치를 이룬다. // 백남준은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전자화했다. // 그리고 현대미술에 추상적 불협화음 전자음악을 도입하다 더보기
[백남준] '괴츠'가 말한 '컴퓨터페인팅'이라는 말에 영감 받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가의 스승인 '칼 오토 괴츠(뒤셀도르프 미대에서 20년간 교수)' 103세까지 장수하였다 // 그의 화풍은 "빠르고, 탄력 있고, 역동적이고, 거의 춤추는 듯하게" 그는 백남준 TV아트에 스쳐가는 '컴퓨터 페인팅'이라는 말로 영감을 주다. "우리 화가들이 이 지구에 남기는 흔적은 빙하가 얼음 이동 중에 남기는 빙퇴석만큼 소중하지만(important),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insignifiant) 보일 수도 있다(„Die Spuren, die wir Maler auf dieser Erde hinterlassen, sind so wichtig und so unwichtig wie die Moränen, die ein Gletscher auf seiner eisigen Wanderung.. 더보기
[백남준] 참여TV, 작곡가-연주자-청중 동급(전시주인공=관객) [전시의 주인공은 관객이다 – 백남준 // 전위음악가로서 백남준은 작곡가와 연주자와 청중 동급으로 보면서 참여 TV를 발상하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발견한다. // 음악의 미래를 위해서는 음악의 형식을 개혁하는 일보단 // 음악의 존재론적 형식을 개혁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작곡가와 연주자와 달리 청중은 음악을 수동적으로 경험해 왔다. // 오랫동안 청중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 체화된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 음악의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함을 인식했다. // 작곡가, 연주자, 청중이라는 음악의 구성원의 참여 수준을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 민주적인 형태의 구조를 확립하고자 했다. // 작곡가의 위치에서 변화를 주도해야 했다. 작곡.. 더보기
[백남준] 아트-과학 결함한 종합예술 - 옥스퍼드 캠프 교수 옥스퍼드 대학 마틴 켐프 교수 백남준의 과학과 예술의 종합판 원고 중 일부 이런 질문이 나온다. So can art be science and science can be art? 이 교수의 화두다. 심각한 교수들 이런 질문을 하지만 백남준에게는 예술과 과학의 경계란 전혀 없다. // 하여간 백남준은 세계미술계 존재 조차 희미한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보기
[백남준] 우리는 결코 단일민족 아니다 박정희는 우리는 단일민족이라고 강조했지만 그건 독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몽골대제국 시대에 고려 왕조의 딸들과 몽골귀족들 결혼정책을 썼기에 피가 많이 섞여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신라의 왕족은 스키타이(흉노) 족에서 온 것이다 신라 문무왕 비에 자신의 조상을 적으면서 스키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훈족(흉노족)임을 확실히 문자화-기록화했다 // 단일민족 이데올로기가 왜 나쁜가? (타 민족 혐오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이 좋아한다. 단일민족을 강조한 지도자 중 히틀러만한 이가 또 있을까? // 히틀러는 수백만 유대인을 대학살하다. // 백남준이 애국주의를 그렇게 증오한 이유다. // 백남준은 항상 자신이 몽골족 후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더보기
[백남준] 1963년 독일 첫 전시 후 일본에 전자공학 공부 1년 백남준 1963년 3월 초 독일에서 첫 전시를 마친 후 // 자신의 전자공학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 1년 남짓 동경에서 1963년 초부터 1964년 초까지 전자공학을 더 심도 있게 공부하다. // 형집에 있으니 생활비를 확 줄일 수 있었다. // 이때 백남준은 처음으로 일본에 요셉 보이스를 소개하다. // 당시 일본은 전자기술에 최고의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 공부하기 더 없이 좋은 나라다 // 당시 일본에는 진공관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히데오 우치다>와 첨단 기술자 슈아 아베>가 있었다. // 백남준은 운좋게 우치다와 친구가 되었고 그의 소개로 아베를 만나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이 이어진다. 백남준은 그 두 사람으로부터 첨단의 전자공학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 세계 최고의 선생들을 만난 셈이.. 더보기
[현묘지도] '최치원과 백남준과 보들레르' 3요소 5감각 [1] 최치원: 한국문화 원류 유불선 종합세트 그러나 이보다 더 훌륭한 풍류가 이미 있었다. 이게 코리아 독창적 미학. 풍류(현묘지도), 그냥 노는 게 아니다 [2] 백남준: 이미지 사운드 모바일 고차원(천지인) 비빔밥(융복합) 전자 미학 [3] 보들레르: 빛깔 소리 향기 오감 다 만족 오차원 감각 미학 현묘지도 신체의 혈관이 다 폭발하는 단계 신명이 일어나야 한국인은 에너지가 무진장으로 분출하다 풍류, 사상과 종교와 예술이 하나 되는 것 - 최치원 [한국인 이상주의] (스키타이) 단군의 에서 시작해, 최제우의 으로 끝난다. [한국인 이상주의] (스키타이) 단군의 에서 시작해, 최제우의 으로 끝난다. 현묘지도 신체의 혈관이 다 폭발하는 단계 신명이 일어나야 한국인은 에너지가 무진장으로 분출하다 풍류, 사.. 더보기
[백남준] 서구예술이라는 우상에 테러 가한 바이러스 '해커' 1963년 백남준 첫 전시 포부는 정말 세계미술계의 위상을 전복시키려는 그의 착상과 커다란 그림(big picture)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 정도로 대단한 것, 서양을 뒤집어버리고 동서양 문화의 균형을 잡으려고 한 것이다 // 백남준은 서양에 직접 가서 원자폭탄 떨어뜨리고 서양미술판을 제로 그라운드로 만들었다. 그 터전 위에 '비디오 아트'라는 서양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혀 새로운 예술의 신기원을 세웠다.// 백남준은 1963년에 그의 첫 전시에서 서양미술을 바닥부터 무너뜨리려고 그들의 성상을 파괴하고 그들이 믿는 서구적 우월주의나 과학주의라는 우상에 테러를 가한 (바이러스) '해커'였다. 백남준은 서양 예술가의 혼을 빼놓고 대혼란에 빠지게 하려고 '피드백'과 '랜덤 액세스'라는 기괴한 노이즈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