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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30대 (1962-71)

[백남준] 비디오아트도 결국 사진에 빚진 셈이 된다

[사진의 발명 가장 위대한 사건] 근대화(현대화)는 사진이 나오자 시작. 재현의 회화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인상파가 나오고 상징파와 표현파가 나오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분리파도 나오고 그리고 추상파가 나오고 구상파(말레비치)가 나오다. 이런 과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폴 세잔이다. 물론 피카소의 입체파와 뒤샹의 레디메이드도 있다 그리고 1960년 이후 마침내 백남준 TV(1년 후 비디오)를 활용한 추상음악으로 하는 미술 즉 전자회화가 나왔다.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까. 하여간 백남준(아티스트) 이후, 인상파 (화가)는 미술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눈이 변했다. 뒤샹까지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백남준 서양에 가서 인상파 그림이 너무 시시하고 하찮게 보였다고 말했다. 그냥 캔버스에 나풀나풀 거리는 유화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올과 대담에서 한 말이다.


<허름한 캔버스 위에 나달나달하는 페인트들이 형편 없더라고.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 예술이다. 뭐 루벤스다 하는 것 직접 가서 보니깐 형편이 없었어!> - 백남준 /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거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 가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 같았어. 난 여태까지 일본 무서워해 본 적 없거든. 일본에서 음악공부 좀 하다가 질력이 나서 진짜 음악 공부해 봐야겠다고 본고장으로 가자고 해서 경박한 나라를 안 가고 독일을 찾아갔거든. 그래서 독일 가서 보니깐 작곡가들이라는 게 전부 엉터리들이더라고. 그것뿐이 아냐. 미술두 그래. 난 옛날에 그 유명한 그림들을 일본놈들이 근사하게 인쇄해놓은 것으로만 봤잖아. 그래서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동경했지. 그런데 직접 가보니깐 허름한 캔버스 위에 나달나달하는 페인트들이 형편 없더라구.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 예술이다. 뭐 루벤스다 하는 것 직접 가서 보니깐 형편이 없었어,
비싼거다 하니깐 대단하게 보였던 거야. 난 정말 실망했지. 이따위 것 가지고 내가 그렇게도 동경했던가. 하구 말야 박물관에 멍허니 앉아있곤 했어. 작곡가도 말야 그 대단한 독일이라는데 쓸만한 놈이 네. 다섯 밖에는 안 되더라고. 네. 다섯명 정도는 탑이었어. 그러니 나머지는 어차피 다 쓰레기 아냐? 그러니깐 난 용기가 나더라구. 우선 네-다섯명 밖에는 안되니깐 내가 낄 자리두 아직 많겠다구 생각도 되고, 또 못 껴도 어차피 시원찮은 놈들뿐인데 그 시원찮은 놈들 속에 내 시원찮은 이름하나 더 끼워 넣는 들 죄송할 게 없잖아. 피차 마찬가진데. 그래서 난 곧바로 작곡가 행세를 해버린 거야. 그리고 처음부터 굵게 놀았지. 그러니깐 내가 독일에서 작곡가가 된 것은 훌륭한 작곡가 때문이 아니라, 나쁜 작곡가들이 하도 많아서 자신이 생겼던 것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