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1974년 <11년간(1968-1979) 미래사회를 위한 보고서(리포트)를 쓰다가> 인터넷 시대(백남준 12세기 말 칭기즈칸이 발명한 '초원고속도로'에서 영감을 받아 '전자고속도로'를 제안)를 선언했지만 당시에는 상용화할 수 있는 인터넷는 없었다. 그런 시대에는 백남준 스스로 인터넷을 만들어 인터넷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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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신문을 거의 무료로 어떤 장애 없이 읽을 수 없는 시대 이게 다 백남준의 덕분이다. 온 인류는 백남준의 은하계 속에 살고 있다. / 백남준 시대는 백남준 돈을 주고 뉴욕 타임스 등 전 세계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를 읽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8개의 주간지와 4개의 월간지와 3개의 일간지를 읽었다" -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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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뉴욕 공연(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을 더 업그레이드 시킨 것인 1978년 백남준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 취임 공개 수업(비디오 비너스)때 소개되었다. 이 사진을 올리면 페북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이 사진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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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식 비빔밥의 특징은 극에서 극이 만난다는 점 / 선사시대와 30세기 첨단 기술이 만나는 그런 방식이다] 가장 고전적인 점잖은 음악에 가장 원시적인 성의 결합 이게 백남준 스타일이다 / 65년부터 유럽 순회 공연 그리고 이런 퍼포먼스가 유럽에서는 66년까지는 그냥 넘어갔는데 67년 뉴욕 공연(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이 공연이 파리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에서 샬럿 무어먼 과노출(토플리스: 4단계로 되어 있다)로 사복 경찰 3명에 의해서 체포가 되었다. 샬럿 무어먼은 얼치기 연주자가 아니고 뉴욕 줄리아드를 졸업한 완전 프로 연주자, 미국국립오케스트라 단원이었다. 샬럿은 외설 혐의로 재판에 붙어졌고 백남준 전 세계 특이 유럽의 영향력 높은 예술가들에게 서신을 보내 탄원서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건은 외설과 예술의 자유논쟁으로 비화하여 뉴욕 미술계 뒤흔들었다. 이런 퍼포먼스를 한다고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빈털털이 백남준 재판을 하려면 변호사가 마련되어야 하는 마음고생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다. 이럴 때 뉴요커 미술가들은 당연히 백남준을 지지했고 결국에는 샬롯 무어먼은 간신히 풀려났다.
시게코 1964년(27살) 7월 4일 뉴욕 도착 마치우나스(플럭서스 창시자)가 영접하다
백남준 1964년(32살) 6월 ?일 뉴욕 도착 샬럿 무어먼(30살 뉴욕 전위예술제 기획자)이 영접하다. 뉴욕 전위예술제 때문(미치광이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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