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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10대 (1932-1951)

[백남준]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초들

한국일보 기사 원본

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001/wk20100107103740105450.htm

 

백남준을 이해하는 몇 가지 단초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92월과 9월 두 차례의 국제 세미나 <백남준의 선물1, 2>를 개최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적절한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내용 중 백남준을 이해할 만한 몇 가지 단초를 추려 보았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다. 바로 전쟁이다. 나는 2차 대전을 겪은 세대다. 백남준은 초기 녹음 작업에서 전쟁 중 사람들이 죽을 때 내는 비명 소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둘 모두에게 친숙한 비명소리다. 우리는 각각 동양과 서양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의 고통을 알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절대로 그것을 다시 겪으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했다가 나중에는 매우 정치적이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플럭서스 그룹 작가)

 

"백남준의 청년기인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지식인인 체하려면 기본적으로 마르크시즘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백남준 역시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수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70년대 한 인터뷰에서 마시즘과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이렇게 밝힌다. "어느 때 나는 내가 잘못된 편에 속해 있는 듯이 느꼈다. 1950년대 우리는 피난 열차를 타고 있었고 도피했다. 나는 내 자신이 어느 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 대오각성이다. 이제 모든 것을 야구경기 보듯 하자. 심각하게 생각할 건 아무것도 없지.' 난 꽤 냉소적이었다." -김수기(시각문화연구자)

 

"백남준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루카치나 카프카도 작품을 헝가리어나 체코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썼다. 조이스나 존 레논, , 와일드, 혹은 베케트가 켈트어로 작품을 썼다면 세계 문화계는 꽤나 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위의 천재들은 자신들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엽적인 자신들의 언어보다 독일어나 영어로 쓰려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모두 각자의 결점을 지닌 사람들인 것이다."

 

백남준의 자기 인식이 돋보이는 대목은 '모두 각자의 결점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이 결점이 바로 언어와 언어 사이에 놓인 자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을 세계인들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일랜드어와 영어 사이에서, 카프카는 체코어와 독일어 사이에서, 영어도 아니고 아일랜드어도 아닌, 독일어도 아니고 체코어도 아닌 독특한 글쓰기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결국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그가 발견했던 세계도 이러한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찾아진 것이다." -함성호(시인·건축가)

 

김수기 강의 전내용 http://njp.kr/root/html_kor/seminar/pdf/2009.02.04_Suki%20Kim_kor.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