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남준 60대 (1992-2001)

[백남준] <미디어의 기억(La Mémoire médiatique)1992년>

<미디어의 기억(La Mémoire médiatique) - 백남준 1992년> 백남준 일제식민지 태평양전쟁 시대 다매체와 정보를 접하면서 경험한 뼈아픈 기억들 / 교실에서 무의식적으로 한국어 말했다가 한국 동급생으로부터 고자질 당해 일본 담임선생에서 혼나는 이야기 등도 나온다 <아래 1992년 화보>

 

영국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상대로 켈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뿌리를 뽑는 데 1000년이 걸렸다. (얼마나 심했으면 켈트어를 쓰면 모가지가 날라간다)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는 데는 겨우 3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본식 완벽주의가 지닌고유의 '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루카치나 카프카도 작품을 헝가리어나 체코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썼다. 그것도 강요가 아닌 자유의지로 그렇게 했다. 나 역시 지금 이 글을 영어로 쓰고 있다(물론 내 의지로). 조이스나 존 레논, 버나드 쇼, 와일드 혹은 베케트가 켈트어로 작품을 썼다면세계 문화계는 꽤 고생하지 않았을까. 위의 천재들은 자신이 전 세계를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국지적인 모국어보다는 독일어나 영어로 글을 쓰려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그들은 모두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었다.1948년 한국은 막 끓어오르기 시작한 아방가르드의 열기를 그대로보여주는 산증인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그 시대 한국의 여러 작곡가가 바르톡, 힌데미트,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와 같은 음악가의 독창적인 양식을 이해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마르크스에 대한 갈증도그중 하나였다. 나는 당시 서울에서 쇤베르크에 관해 한 챕터나 할애한현대음악 관련 서적 한 권을 발견했다. 전쟁 전 일본에서 발간된 책이었다. 이처럼 문화는 쌍방향으로 난 길과도 같다.1940년에 한국어로 발행되는 모든 일간지가 폐간되었다. 일본 식민지정부 기관지만이 예외였다. 월간지도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어떤 한국 기업체도 월간지에 광고를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정작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1941년에서 42년 사이에는 전쟁으로 종이가 부족해지면서 일본 잡지조차도 점점 얇아졌다. 1941년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