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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50대 (1982-91)

[백남준] 홍익대 김은지 교수, 하늘을 나는 물고기 모든 것 설명

[김은지 홍익대 교수] <이 작품 제작에 필요한 83대의 TV를 한꺼번에 조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고민은 1984년 여름에 한국의 삼성전자가 120대의 TV를 지원해 줌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때부터 백남준과 삼성은 매우 가까워졌다. 백남준도 전에는 SONY를 많이 사용했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

 

백남준 1985년 뒤셀도르프의 미술관(쿤스트무제움 Kunstmuseum)에 소장된 작품 <하늘을 나는 물고기>에 대한 모든 것을 자세히 적고 있다 /

 

1초마다 변화무쌍한 모니터 화면이 달라진다. 백남준 원래 1974년 이 작품을 시도했지만 당시에는 그럴 만한 제작비가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제작비가 적게 드는 TV 부처가 나온 것이다. 이 백남준 대표작은 뉴욕 미술계와 유럽 미술계까지 대박을 치고 결국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되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백남준이 굶지는 않게 되었다.

 

[김은지] 특별제작: 백남준은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1985년 봄에 완성했다.

 

뒤셀도르프의 미술관(쿤스트무제움 Kunstmuseum)을 위해 특별 제작해 미술관 2층의 한 전시실 천정에 설치했다. 19855월에 있을 미술관의 새 개관에 맞춘 제작이었다. 1979년부터 미술관은 보수 및 확장공사를 위해 잠시 폐관했었다. 이후, 6년 만의 새 개관이었다. 뒤셀도르프 미술관은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며 신(개관에 맞추어 시대 예술작품 수집정책 일환으로 당시의 주요 대표 작품들을 수집했다. 그중 하나가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이었다.

 

하지만 통례적 과정을 거쳐 수집된 당시 예술 작품에 비해,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수집과정은 특별했다. 한 미술관 내의 특정 공간을 위해 제작된 '주문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회화나 조각처럼 기존의 장르작품이 아닌 아직 생소한 비디오 작품을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이 작품수집 제안은 1982년에 시작되었다. 이 수집 발상은 시기적으로 미술관의 신축과도 연관이 있었다. 1982년 가을, 미술관은 새 개관 일정을 3년 뒤인 1985년으로 결정했다. 수년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 끝에 이뤄진 새 개관이었다. 19832, 이 제안은 채택되었다. 최종 수집결정은 곧 이뤄졌다.

 

1983년 봄, 당시 뉴욕에 있던 백남준은 이 특별한 제작 제안을 수락했다. 그의 미술관을 위한 첫 주문 비디오작품 제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작품제작 초안이 마련되고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라는 채)가 정해졌다. 작품 모티브는 물고기였다.

 

이것은 1980년의 콜라주 작업 물고기의 자유를 위한 소나타 (Liberation Sonata for Fish: 작은 마른 생선을 편지봉투에 붙이고 봉투 위에 물고기를 위한 자유 소나타, 제발 물고기를 바다로 돌려보내'가 쓰인 작품 때부터 즐겨 사용하던 것이다.

 

작품의 설치 장소는 바닥이 아닌 천정으로 결정했다. 천정을 이용한 작품설치는 처음이 아니었다. 1975년 뉴욕의 잭슨(Martha Jackson) 갤러리에서 처음 시도한 이후 1950년대 초 전시 때에도 사용했던 것이었다.

 

뒤셀도르프의 불고기가 하늘을 날다"1983년에 원래 3대의 컬러 TV로TV 계획되었다. 하지만, TV (R)는 곧 두 배인 85대로 늘었다. 백남준이 변경한 작품구성 43대를 천정에 흩어 개별로 설치하려던 설계 구성 대신, 88대를 모아 대형 작품 형태로 설치하는 안으로 변경했다. 1981년이었다.

 

작품제작 TV 수의 증가는 구입을 위한 예산증가를 의미하기도 했다. 컬러TV1980년대 중반까지에 속했다. 경제적·기술적 여건상 작품제작에 필요한 83대의 TV를 한꺼번에 조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고민은 1984년 여름에 한국의 삼성전자가 120대의 TV를 지원해 줌으로써 해결되었다.

 

예산 초과의 어려움과 불확실한 후원의 문제가 삼성 전자가 지원해 주기 전) 가로놓였음에도 뒤셀도르프 미술관은 백남준의 이 거대한 실험적 비디오 작품이 '모험'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 계기는 작품 TV-원추(圓錐TV-Trichter)"를 통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