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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사유에 대한 단상

[백남준] 그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삶과 예술을 이렇게 말했다.

한자는 비주얼언어 비디오아트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흥' 전에서 백남준 작품보다 더 좋은 큐레이팅이 등장했다 바로 아래 장면인에 1003자의 A4용기에 백남준의 텍스트와 이미지 그의 ABC가 다 들어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때로는 큐레이터는 작가보다 더 창의적일 수 있다 김남수평론가 co curator의 승리다

 

"나는 광주를 현대사와 관계시키기보다는 고인돌, 석조건축(거석문화)과 같은 광주의 문화유산에 관심 있어요. 광주의 석조문화가 선사시대의 스톤헨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것의 현대판을 만들 생각 중에 있지요." - 백남준

백남준 전자고인돌 1995

 

이 작품은 비디오아트의 대부 백남준(1932-2006)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위해 제작한 이후 이곳에서 여러 차례 전시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며 그 누구보다 초국가적인 삶을 살았던 백남준은 시대를 앞선 예술가였고, 국제무대를 향한 포부를 갖고 시작하는 광주비엔날레가 대표 작가로 내세우기에 그보다 더 확실한 선택은 없었다.//

백남준은 광주비엔날레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인돌> 제작뿐 아니라 개막식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더불어 비디오아트와 인터렉티브 컴퓨터 아트 전시에 초점을 둔 특별전 인포아트를 신시아 굿맨, 김홍희와 공동기획하기도 했다.

<고인돌>은 백남준 특유의 '비디오조각' 작품을 따르는 동시에 전자 매체의 통합력,’‘신체의 기술적 확장, ‘우주의힘과 리듬'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작가의 주요 관심사가 결합된작품이다. <고인돌>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쿠바 작가 크초(Kcho)<잊어버리기 위하여>와 함께 광주비엔날레재단의 소장품이 되었고, 2011년부터는 광주비엔날레재단 사무동 건물 1층 내부에 보관되고 있다. 크초의 작품은 이번비엔날레 중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지진: 충돌하는 경계들 전을 통해 오랜만에 전시장에 나오게 된다.<고인돌>은 텔레비전을 기둥·연방 형식으로 쌓아 올린형태를 띠는데, 이는 아시아 대륙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 기원전무른 양적인 고인돌'이라는 가설의 형태를 따온 것이다. 백남준은특유의 철학과 기교로, 선사시대 장례문화를 가져와 전자시대의삶과 죽음에 대한 일종의 기념비'를 만든 것이다. 이번 2015년 광주비엔날레의 <귀환>전 기획을 맡은 큐레이터는 <고인돌>이 광주비엔날레 역사에서 갖는 의의와 안티비엔날레와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이 작품을 보수 후 망월동 구묘역이나 광주비엔날레전시관에 전시하기를 제안하였으나, 보수에 드는 비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20여 년이 훌쩍 지나 2018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고인들>은 광주의 역사와 추모의 무의식 (funerary unconscious)에 대한 여러 질문을 제기하며 신중한 고찰을 요구한다. 예술은 기념이나 추모 이상의 기능을 가질 수 있을까?예술이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서 '중재'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동시대미술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공공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컬렉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가장 먼 과거를 알아야 가장 먼 미래를 볼 수 있다 비저너리 예술가의 무기다. 진정한 예술가는 문자가 없었던 선사 시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유물 혹은 과거의 고전 문서를 제대로 발굴하고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잉카),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 지평을 봤다." - 백남준

 

1956년 백남준 독일로 유학 갔는데(혹은 가는 중에) 그때 여행 가서 본 이집트 피라미드가 보는 곳인지? 지는 노을을 보고 감동한 풍경인가 -1984년 백남준이 일본 와타리(일본 갤러리스트로 백남준을 평생 지원하다. 와타리 미술관 관장)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도록에 나오는 글 같다

왜 예술가는 뉴욕으로 가야하나? 지옥 같은 곳을 가야 천국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백남준의 말이다

 

(전자) 감각적 쾌락주의자 백남준, 보들레르의 "모든 감각 다 만족(Correspondance 총체적 공감각 미학)" 영감을 받은 것이다. / 아래 '모든 감각의 만족' 그리고 '상응'이라는 말은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어휘들이다

 

백남준은 시공간마저도 비빔밥을 만들려고 했다 마치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음악과 미술을 비빔밥을 만들었듯이...

 

백남준 전자 물리학과 신경계 생리학 발언에 가까이 가면 어려워진다

 

백남준의 상상력은 경계가 없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한반도 감옥에 갇혀 살았다 백남준 만 30살에 내가 황색재앙(내가 문화 칭기즈칸으로 전 세계 미술(특히 유럽미술)을 칭기즈칸처럼 쓸어버리겠다)이라는 선포를 하면서 세계미술계에 데뷔하다. 백남준이 1960년 경 독일 쾰른 예술가 모임에서 "짐이 곧 황화다라"는 인쇄물을 뿌렸는데 처음에는 거부반응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하도 설치고 다니니 콧대 높은 독일인들도 수긍했다고 한다 백남준 서양인 겁줄 때 가장 큰 백은 바로 칭기즈칸이다. 내가 그의 후예라는 것이다. 백남준 독일 대학에서 엉덩이 까고 몽골 반점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통해서 그걸 확인시켜 주었다.

 

백남준 왈,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보들레르의 <순간의 예술론>을 바슐라르가 해설하다. 현대 예술은 "영원성을 위협한다" <한 순간(찰나) 안에서 영원이 있다 이것은 이미 화엄불교에서 터득한 진리다>

<음양의 조화 내지 음양의 교합=하모니와 창조가 일어난다> 태양(불, 양이다)과 바다(물, 음이다)가 섞이면 영원이 된다. 물과 불의 연금술이 예술이다

 

백남준은 인터넷 없는 시대에 세계신문을 통해서 인터넷을 봤다 물론 한국신문과 독일신문 슈피겔지도 같이 읽었죠 백남준은 뉴욕주식시세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번은 백남준 월가 금융계 회장의 초대로 레스타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월가의 인사발령까지 다 알고 있어 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백남준이 가장 좋아한 한국의 역사문서는 삼국유사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한국인의 판타지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대신 왕조사관인 삼국사기는 전혀 좋아할 수 없었죠 김훈과 도올과 인터뷰에서 그런 점을 밝힌다

 

백남준 비디오의 암호코드가 보들레르의 시 '상응'에서 왔다. 상징파 시인 보들레르의 빛과 어둠을 넘어서는 세계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와서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세계 가 되었다.

 

<요새> 백남준에게 상형문자인 한문은 그 자체가 비디오아트였다 그러니 그가 한글전용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이었다 문화강국이 되려면 다양한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데 언어순결(언어애국)주의에 대해서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래저래 백남준은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애국주의를 싫어했다 프랑스가 뒤지는 것은 바로 독일처럼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순종언어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그나라의 어휘수가 줄어든다는 견해다 어휘가 많은 나라가 최고의 문화강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1만5천?단어의 한문을 빌려쓰고 있는데 말이다 ㅋ

 

<비디오아트> 백남준은 시공간마저도 비빔밥을 만들려고 했다 마치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음악과 미술을 비빔밥을 만들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