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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40대 (1972-81)

[백남준 ] 작품 소장, 독일처럼 보수적인 미술관에서

<독일처럼 보수적인 미술관에서 아래 백남준 작품을 소장했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하긴 독일에서 비디오아트의 탄생한 곳이기 그런 의미를 둔 것인가. 매우 긴박하게 필요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독일의 보수적 미술관은 백남준의 진보를 수용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마치 필요에 의한 보수와 진보의 결합과도 같은 것이었다. // 또한 마치 타파할 수 없는 보수의 진보성을 과격의 상징인 백남준을 통해 털어버리려 했던 것과도 같았다. -김은지. // 독일의 뒤셀도르프 미술관은 아래 작품(88TV 모니터 사용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 1985년 비디오조각으로 불리다. // 이 작품 수집 제안은 1982년이다)을 드디어 소장하다. // 작품이 천장에 붙는 백남준의 기상천외하고 엽기적인 것이었다. // 그러나 동심, 어린아이의 거침 없는 상상력이 활활 타오르는 작품이었다. // 백남준 1982년 미국 휘트니 미술과 1982년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 화려한 회고전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자 // 독일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소장할 단단한 결심을 한 셈이다. // 게다가 이런 작품을 비디오아트의 탄생지인 독일에서 소장하는 것은 긴박한 일이었다.

 

 

<백남준이 1978년 독일에서 교수가 된 것은 1977년 카셀 도쿠멘타가 출품작 'TV 정원'이 결정적이었다(?)> // 양혜규가 독일에서 백남준과 같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 사실 한국인이 독일에서 대학교수가 되는 것은 쉬운 일 아닌 것 같다. 독일에서 교수를 한 철학자 한병철도 그렇게 말한다. 한국인이 독일에서 교수 되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철학자 송두율이 일찍이 독일 뮌스터 대학 교수를 했다 // 1970년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 그러나 백남준은 1970년대 독일에서 교수가 되었다 // 독일은 교수가 될 때 학위를 중시하지 않고 실력을 중시하는 것 같다 // 미술대학이니 그렇지만 양혜규도 박사는 아니다 //

<백남준 70년대> 까다롭기로 유명한 독일에서 그를 두루 관찰하고 연구하고 검토하다 가장 뛰어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하다. 그래서 그를 독일대학 교수로 초빙하다. 처음에는 함부르크에서 그리고 뒤셀도르프에서 결국 뒤셀도르프 교수가 되었다 1977년 카셀 도쿠멘타가 결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