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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40대 (1972-81)

[백남준] 무명 시절 지원자 '장 피에르 빌헬름' 사망 10주년 추모

백남준 무명 시절 그를 도와준 장 피에르 빌헬름(독일 미술계 정신적 아버지로 백남준과 플럭서스 후원자) 사망 10주년에 그에 대한 경의와 존경의 표시로 사진을 주문해 찍다 <아래 사진 만프레드 레베(Manfred Leve) '백남준의 장 피에르 빌헬름에 대한 경의' 1978(백남준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 교수로 취임하던 해) 흑백 25*15cm 사진저작권 만프레드 레베> * 장 피에르 빌헬름은 19687월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아래 사진 만프레드 레베(Manfred Leve) '백남준의 장 피에르 빌헬름에 대한 경의' 1978년(백남준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 교수로 취임하던 해) 흑백 25*15cm 사진저작권 만프레드 레베> 

 

걷는다, 뛴다, 행인들을 바라본다, 생각에잠긴다, 웃는다. 백남준은 만프레드 레베에게이런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찍어 달라고청했다. 장소는 갤러리 22가 위치했던 곳으로,백남준이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처음 발표할 수 있었던 곳이다. 당시 25살이었던 백남준은 다름슈타트 국제 여름음악강좌에서 자신의 첫 곡을 발표하기 위해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잘성사되지 않았고 낙심한 백남준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갤러리 22를 운영하던 장 피에르빌헬름이었다. 이후 빌헬름은 백남준을비롯한 플럭서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빌헬름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 백남준은가장 평범한 일상의 행동을 통해 빌헬름을 추모했다. 삶의 미디어와 예술의 미디어가 하나가 되는 순간, 백남준 스스로가 가장 의미있는 인터미디어가 되었다 / “Walking, running, looking at passersby, pondering, and smiling.” Nam June Paik asked Manfred Leve to take photographs of those seemingly meaningless actions. The venue was where Galerie 22 used to be, the gallery where Paik’s Hommage à John Cage (1959) was first shown. At that time, the twenty-five-year-old Paik was unsuccessfully striving to premiere his first composition at the International Summer Course for New Music in Darmstadt. It was Jean-Pierre Wilhelm, the owner of Galerie 22, who offered a hand to this disappointed young artist. Since then, Wilhelm became a powerful patron of Fluxus artists including Paik.

After ten years had passed since Wilhelm died, Paik memorialized him with the most common everyday behaviors. At the moment when the media of life and of art were unified as one, Paik himself became the most meaningful inter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