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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60대 (1992-2001)

[백남준] 정재숙 전문화재청장 1990년 백남준 만남과 후일담

정재숙 기자 후에 문화재청장으로도 일했다. 그녀가 기자가 된 지 3년 후에 1990720일 백남준 생일에 백남준을 만났다.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요셉 보이스 추모굿판에 참석했다. 바로 그때의 글이다 <사진 최재영>//

 

<빛과 바람이었던 백남준>

 

백남준 선생을 미술기자로서 처음 대면한 순간은 1990720, 여름 햇살이 쨍한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 뒷마당에서였다. 쉰여덟 생일을 맞은 사내는 에너지 넘치는 칭기즈 칸의 후예였다. 그 명성과 작품 얘기는 이미 짜하게 들어왔지만 3년 차 현장 기자의 뚝심은 묘한 호기심으로 발동되었다. '뭐가 그리 대단한지 직접 파헤쳐보리라'는 오기 비슷한 게 가슴에서 불끈했다. /

 

도심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떠들썩한 굿판을 이끄는 백 선생은 명불허전(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름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었다. 헐렁한 두루마기에 삐뚜름히 갓을 쓴 그는 별신굿과 행위예술을 곁들인 이 추모제를 5년 전 죽은 독일 전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1921-1986)에게 바쳤다. 형제처럼 지냈던 보이스의 넋을 부르는 그의 모습은 큰무당처럼 보였다.

 

당시 진도에서도 용하다고 소문난 만신 가족이 불려왔지만 백 선생의 신기에 눌려 그 1급 프로 무당들이 오히려 뒤로 물러앉았을 정도였다. 이날 한바탕 굿이 끝나고 나서 큰 벼락이 떨어져 마당에 서 있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지끈 부러졌는데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백 선생은 "보이스가 왔다 갔구먼"이라며 좋아했다. 2006129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동양계 전위예술가 백남준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튿날 뉴욕 타임스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 '성공한 반란자'라는 평을 내렸다. 기존의 심미적 관념을 뒤집고 조롱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도전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늙을 때까지 유지한 드문 사람, 테크놀로지와 전자매체에 어떻게 인간성을 부여하느냐를 끈질기게 추구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 기렸다.

 

전 세계 언론에서 쏟아지는 추모의 메시지를 보면서 '빛 남기고 간 비디오아트 칭기즈칸'이란 제목의 부음을 썼다.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그는 갔어도 치열하게 타올랐던 그의 전위정신은 길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사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목에 붙인 것처럼 백남준을 생각하면 ''이 떠오른다. 빛과 바람이 느껴진다. 그는 빛이었고 바람이었다. 지난 30여 년 몇십 차례 그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백남준이란 거대한 호랑이의 꼬리만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의 생전에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 그래서 턱없이 부족한 기사를 쓴 일이 통탄스럽고 죄스러웠다. 2008108일 경기도 용인시 상갈동에 백남준아트센터가 문을 열었을 때도 아쉬웠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옥호까지 지어놓고 개관을 기다리던 고인의 얼굴이 떠올라서다.

 

이런 부끄러움 덕일까. 기자 시절 내내 그와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2010년 가을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전'(이어 영국 테이트 리버풀에서 20101217~2011313)에 당시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 관장과 '백기사(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의 이경희, 송정숙 선생과 함께한 일주일은 좀 과장하자면 백남준의 혼과 접신하는 희귀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사후 4년 만에 열린 그 대회고전은 살아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거장의 귀환이자 환생 현장이었다. 밀려드는 관람객들 얼굴마다 백남준을 향한 존경과 애정의 염을 발견한 것도 가슴 벅찼지만 쾰른, 부퍼탈 등지로 백남준의 발길을 좇아 이어진 여정은 페키안 (Paikian, 백남준주의자)이 되고픈 열망을 부추겼다.

 

이영철 관장이 '백남준 전쟁'이란 과격한 표현을 동원해 다짐할 만큼, 세계 문명사에서 얻었다. 그의 위치를 제대로 잡아주기 위한 임무가 우리에게 남겨졌다는 깨달음을 그래서 열심히 썼다. 여러 매체를 거치며 다양한 지면에 쓴 백남준 관련 글은 이상하게 버리지 않고 모으게 되었다. 라면박스 한 상자에 가득한 그 인쇄물과 프린트한 종이더미를 뒤지다 보면 문득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명제가 떠오른다.

 

아직도 백남준은 여기, 우리 곁에서 새로운 예술가 종족의 선구자로서 무질서한 것들, 놀라움에 관심이 많다고 우리 정신의 안일함을 꾸짖고 있다.

 

동서양의 사고체계를 꿰뚫어 비디오아트라는 작품세계로 완숙시킨 뒤 서구 문명의 교란자로 떠돌았던 예술의 칭기즈칸 백남준,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 했던 그의 언명이 메아리처럼 들려올 때 다시금 그가 남긴 시적(詩的) 자서전의 한 구절을 되씹어본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