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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60대 (1992-2001)

[백남준] 60살에 뉴욕에서 쓴 '플럭서스론' 완숙한 시대의 증언이다

플럭스서의 창시자 마카우나스

 

<백남준이 60살에 뉴욕에서 쓴 '플럭서스론' 완숙한 시대의 증언이다> < 플럭서스는 30년이나 같이 하면서 헤게모니 쟁탈전도 없었고, 순수한 우정으로 글로벌 운동, 글로벌 우정의 모델을 만들었다> <플럭서스 회원이었던 극작가 하벨이 나중에 체코 대통령이 되다. 이 그룹에서 대통령 2명인가 3명인가 나오다>> <플럭서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궁화처럼 질긴 꽃이다> <약소국 사람과 강대국 사람들이 같이 작업하면서 큰 내분이 없었던 예술운동은 플럭서스뿐>

 

플럭서스는 서방에서는 문화혁명을, 동구에서는 정치혁명을 일으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플럭서스 창시자인 조지 마키우나스, 그리고 1990년에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된 비타우타스란츠베르가스는 리투아니아의 공업도시 카우나스(11세기경에 세워졌다 함)의 어떤 초등학교를같이 다닌 가장 친한 친구였다.

 

건축가인 마카우나스는 16/7세 때 미국으로 이민오게 되지만, 소련-독일 점령시절/전쟁/ 독일군과 함께 베를린으로 후퇴/ 배고픔/ 난민수용소 생활/부친의 변사(자살?) / 뉴욕의 허영/자본주의의 모순 등 엄청난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심한 천식환자, 열광적 개량주의자, 그리고 부분적 편집광이 되었다. 그의 아집이 플럭서스를 만들고, 헌신적으로 플럭서스를 끌고 나갔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는 또한 훌륭한 조직자였고, 천재예술가였다.

 

한편 음악교수이고 열렬한 반-맑스주의자인 란츠베르기스는 1990년 집권에 성공하고 이듬해에는 조국의 독립을 성취한 리투아니아 민족지도자로서 동구의 정치혁명에 30%쯤 기여했다.

 

1962년 플럭서스를 조직한 마키우나스는 리투아니아에 남겨놓고 은 그의 옛 친구란츠베르기스에게도 연락을 취한다. 란츠베르기스는 1963125일 마카우나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하수구 찬가"라는 반체제적인 공연작품을 보낸다. 또한 란츠베르기스는 미에코시오미가 조직한 메일 아트 이벤트에도 몇 차례 참여한 플럭서스의 일원인 것이다. 플럭서스는 조그만 놈들이 자립자존의 정신에서 우리말로 하자면 하면 된다"는 정신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약소국 사람과 강대국 사람들이 같이 작업하면서 큰 내분이 없었던 예술운동은 플럭서스뿐이 없다. 플럭서스는 30년이나 같이 하면서 헤게모니 쟁탈전도 없었고, 순수한 우정으로 글로벌 운동, 글로벌 우정의 모델을 만들었다. 예술은 위계에 묶여 있으면 안 되는데 실제로는 철저한 군대식 제도에 묶여있다. 각 민족의 이해관계, 경제적 힘이 예술계에 반사되어있고 백이 없으면 좋은 쇼를 해야 신문에 한 줄 나오지도 않는다.

 

젊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자립해서 운명을 개척해야겠다. 스스로 자유를 찾겠다 해서 성공한 것이 플럭서스다. 네오다다는 다른 예술운동에도 있었는데 플럭서스만이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고 유명한 것은 무언가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플럭서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질긴 꽃이다. 제일 늦게 피어서 제일 오래가는 무궁화와 같은 꽃이다. 플럭서스는 30년 동안 활짝 피지는 않았으나, 지지도 않고 꾸준히 피어 온 일상 행위로 유명해졌다.

 

플럭서스는 무궁화와 같은 질긴 정신, 자립 자존의 정신, 하면 된다는 정신을 예술에 적용한 경우이다.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일본에서도 한다 한다 하면서 아직 한 번도 못했다.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주최해서 플럭서스 작가를 20명 가까이나 데려온다는 것은 우리가 일본보다 어느 면에서 더 앞선다는 뜻이 된다. 외국사람 큐레이터 쓰는 것도 그렇다. 내가 과천 전시회 할 때 현대예술 세미나를 한 것과 같이 큰 의미가 있겠고, 더 모험도 되겠다. - 19921219일 뉴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