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백남준이 작곡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 쾰른 악보를 보면 대부분 콘텐츠가 유럽과 아시아 반반씩이 들어간다>, <백남준은 1960년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동급으로 봤다. 다시 말해 백남준은 1961년부터 동양과 서양의 문화 비중을 50:50으로 배치하다> 이게 그렇게 쉬운 일 아니다. 예컨대 우리 교과서에 서양인 100명 들어와 있다고 치자, 그때 과연 서양 교과서에 한국 등 동양인 몇 명이나 들어가 있겠나를 생각하면 바로 이해가 된다. 특히 한국은 더 드물겠죠.
백남준 1961년 동서양 예술에 있어 그 위계(hierarchy) 50: 50으로 잡다 1961년이면 현실적으로 동서양의 예술적 위계 10:90 정도였으리라 이것을 적어도 50: 50으로 만들겠다고 서양미술을 기초부터 흔들다 백남준 1963년 첫 전시에서 서양미술판에 원자폭판을 떨어뜨리다. 초토화 시키다 어떻게? 그게 바로 서양에는 족보가 없는 비디오 아트를 창안한 것이다. 지금도 사실 동양과 서양의 교과서에서 한국 등 동양이 서양 교과서에 50% 차지하기 쉽지 않다 백남준 정말 단군의 후손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으로 넘치는 특별한 한국인이었다.
1961년 백남준이 작곡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 쾰른 악보를 보면 대부분 콘텐츠가 유럽과 아시아 반반씩이 들어간다 그리고 미국 것도 들어간다. 그러니까 백남준은 1960년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동급으로 봤다. 즉 유라시아 문화를 연결시킨 것이다. 첫 번째 자료에서 보면 프랑스, 미국, 한국, 일본, 인도, 러시아, 스페인, 중남미 노래 등등 그러니까 전 세계 음악을 골고루 집어넣다. 두 번째 자료에서도 미국이나 유럽 중심의 사고에서 벗아났다. 2번째 자료를 봐도 그렇다. 물론 소음과 비명을 존 케이지의 영향으로 음악의 확장으로 보다. 중국, 미국, 독일, 고대 로마, 중국 오페라 등과 같이 유라시아 소리와 음악을 거의 반반식 섞었다. 이런 발상을 1960년에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끝 부분에는 반드시 <관객 참여 프로그램(예를 들면, 나무 조각, 돌, 자갈, 금속 조각, 흙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관객이 거기에 발길질하라고 촉구한다)>을 집어넣는다. 요즘 말로 interactive art 를 실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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