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이전부터 백남준 조수를 한 폴 게린(그도 비디오아티스트)과 인터뷰(2022년) 중
질문: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대답: 그저 백남준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를 존경하고 존중해야 되는 건 맞지만 그가 얼마나 유쾌한 사람이었는지 기억해야 해요. 그리고 얼마나 풍자적이고 시스템에 반하는 사람이었는지. 많은 사람이 백남준을 특유의 방법으로 묘사하지만 저는 제가 예전에 했던 것만큼 잘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백남준이 작고했을 때 저는 칼 솔웨이에게 편지를 썼어요. 제가 그 편지에 썼던 것처럼 다시는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편지를 다시 돌려 받으면 좋겠네요.
본질적으로 백남준은 '아나키스트'였어요. 그의 친구들을 한번 보세요. 렌 긴즈버그, 주디스 몰리노 등 모두 아나키스트들이죠. 그리고 또 그는 <인습 타파주의자>였어요. 이전에 얘기했던 한국 전통 의식 있잖아요.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나요? 어떤 이의 관점에서는 그가 상징적인 아이콘을모독하는 걸로 볼 수도 있어요.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백남준의 모든 작품은 그의 외교 수완이 담겨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초기 작업인 프랑스 국기, 미국 국기 그리고 개선문까지, 프랑스의 대표적인 아이콘 2가지가 들어가 있죠. 프랑스 국기와 개선문,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문 등 이 작업은 제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작품들이에요. 굉장히 훌륭한 작품들이죠. 그리고 또 프랑스 혁명과 로베스피에르 등 이런 모든 국가 상징 건축물과 인물을 넣은 것은 그 나라에 선사하는 백남준의 선물과 같았어요. - 뒷부분 일부 생략
1995년 1회 광주비엔날레 참석한 백남준
백남준 조수 폴 게린과 인터뷰 중 마지막 부분
"모두 다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구를 손상시키는 것인지 몰라요 저도 이제 65세예요 향후 30년 어쩔지 모르겠어요. 굉장히 끔찍할 거예요. 여러분이 이 위기를 잘 넘기고 잘 살기를 바래요" / 이 내용은 50년 전 백남준 작품 'TV정원'에서 경고(환경재앙)한 내용을 다시 상기시킨다
폴게린과 인터뷰(2022년) 중 / 질문: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대답: 그저 백남준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를 존경하고 존중해야 되는 건 맞지만 그가 얼마나 유쾌한 사람이었는지 기억해야 해요. 그리고 얼마나 풍자적이고 시스템에 반하는 사람이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백남준을 특유의 방법으로 묘사하지만 저는 제가 예전에 했던 것만큼 잘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백남준이 작고했을 때 저는 칼 솔웨이에게 편지를 썼어요. 제가 그 편지에 썼던 것처럼 다시는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편지를 다시 돌려 받으면 좋겠네요.
본질적으로 백남준은 '아나키스트'였어요. 그의 친구들을 한번 보세요. 렌 긴즈버그, 주디스 몰리노 등 모두 아나키스트들이죠. 그리고 또 그는 <인습 타파주의자>였어요. 이전에 얘기했던 한국 전통 의식 있잖아요.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나요? 어떤 이의 관점에서는 그가 상징적인 아이콘을모독하는 걸로 볼 수도 있어요.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백남준의 모든 작품은 그의 외교 수완이 담겨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초기 작업인 프랑스 국기, 미국 국기 그리고 개선문까지, 프랑스의 대표적인 아이콘 2가지가 들어가 있죠. 프랑스 국기와 개선문,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문 등 이 작업은 제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작품들이에요.
굉장히 훌륭한 작품들이죠. 그리고 또 프랑스 혁명과 로베스피에르 등 이런 모든 국가 상징 건축물과 인물을 넣은 것은 그 나라에 선사하는 백남준의 선물과 같았어요. - 뒷 부분 생략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 1995년(?)이다. 1995년은 1988년 올림픽(한국이라는 나라가 단지 경제적인 측면에서 세계화되는[세계에 데뷔하는] 첫해) 보다 더 중요한 해이다. 왜(?) 1995년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미술과 문화가 세계화되는 첫해였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난제를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은 백남준이라는 작가가 해낸 것이다 <아래 1995년 백남준 광주 일로 과로해 백남준 다음에 쓰러지다>
<특히 광주가 대단한 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자비디오아트 특별전(INFOART)을 열다 당시로는 첨단미술분야. 백남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뉴미디어작가 광주에 총집결시키다 이 특별전 큐레이터는는 미국 등 전 세계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미디어 아트 큐레이터 '신시아 굿맨 박사'를 초대. 아래 사진 가운데 / 김홍희 관장도 이 전시에서 처음으로 한국 측 큐레이터로 데뷔하다. 사진 천호선
<1984년이전부터 백남준 조수였던 미국인 폴 게린(아래 사진 왼쪽)의 증언> <광주비엔날레 성공시키기 위해서 광주 참가 작가들에게(외국인 작가는 백남준이 다 아는 사이) 돈을 막 나눠주었어요 - 폴 게린> 백남준 이렇게 고생하면서 광주비엔날레를 성공시키다. 광주는 세계 비엔날레 순위가 3-4위
첫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을 봤을 때 그는 수많은 작가들이 그 전시에 참여할 수 있게 돕기도 했지만, 그 비엔날레 자체가 실현될 수 있게 도와줬어요. 그리고 광주비엔날레는 아직도 열리고 있죠. 이것이 첫 광주비엔날레였어요. 제가 잊지 못할 장면이 있는데 백남준이 현금으로 가득 찬 초록색 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고 있었어요. 그게 전시 예산이었을 거예요. 그는 작가들에게 돈을 막 나눠주고 있었어요. 저기가 뭔가 필요한 것 같으면 주고, 또 다른 데도 주고 그냥 현금을 막 나눠주고 있었죠. 이 모든 것이 다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적인 개최를 하기 위함이었고, 그게 그가 제일 신경 쓴 부분이었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성공적이었죠
<1984년부터 백남준 조수였던 미국인 폴 게린의 증언> 사실 백남준 그리고 크리스토와 장 클로드 (Jeanne-Claude,1935-2009) 빼고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고용한 작가가 없어요. 백남준은 본인이 작가였지만 수많은 다른 작가들을 고용했어요. 저도 그중 하나였고, 저에게 직업이었죠. 처음에는 수많은 직업 중 하나였고 저도 비디오 작업들도 해야 했지만 백남준과 일하면서 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그게 제가 다른 작업들을 할 수 있게 지원해 주었어요. 백남준은 굉장히 관대한 사람이었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걸 중요시했어요. 첫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을 봤을 때 그는 수많은 작가들이 그 전시에 참여할 수 있게 돕기도 했지만, 그 비엔날레 자체가 실현될 수 있게 도와줬어요. 그리고 광주비엔날레는 아직도 열리고 있죠. 이것이 첫 광주비엔날레였어요. 제가 잊지 못할 장면이 있는데 백남준이 현금으로 가득 찬초록색 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고 있었어요. 그게 전시 예산이었을 거예요. 그는 작가들에게 돈을 막 나눠주고 있었어요. 저기가 뭔가 필요한 것 같으면 주고, 또 다른 데도 주고 그냥 현금을 막 나눠주고 있었죠. 이 모든 것이 다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적인 개최를 하기 위함이었고, 그게 그가 제일 신경 쓴 부분이었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성공적이었죠, 80만 명의 사람들이전시를 관람했어요. 저도 두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 비엔날레 하나로 저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어요. 80만 명의 사람들이<하얀 악마(White Devil)>와 <순찰 위원회 (Board ofPatrol)>를 관람했으니까요. 백남준도 몇몇 작품을 전시했던 것 같은데 그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을 문화의 중심지로 세계지도에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아마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적인 주요 전시였을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백남준이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그 장면이 가장 놀라웠어요
비엔날레재단과 광주비엔날레재단은 2011년 베니스에서 세계비엔날레 포럼 제1차 개최를 위한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 마리에케 반 할 비엔날레재단 이사장과 강운태 광주광역시장 겸 광주비엔날레재단 이사장님께서 2011년 6월 3일 베니스 모나코 호텔에서 두 기관을 대표하여 2012년 제9회 광주비엔날레를 계기로 광주에서 개최되는 제1회 세계비엔날레포럼의 조직에 협력하기로 하는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이건 세계적인 사건이다.
세계비엔날레 협회 홈페이지 광주비엔날레를 소개 그 내용이 엄청나다. 여기를 거쳐간 사람들 세계 미술계 탑 인사들 수두록 하다. 백남준과 같이 활동하면 백남준 전문가가 된 이용우 선생은 베니스비엔날레 심사위원을 물론 세계비엔날레 회장(이사장)도 역임
다음 달 10월이나 11월 '백남준 포럼'은 <백남준과 광주 비엔날레> 하면 어떨까 싶다. 1995년 이야기부터 2024년 지금의 이야기까지 백남준 광주 비엔날레 국가관이 31개로 늘어난 것을 하늘에서라도 매우 좋아할 것 같다. 백남준이 쓰러지기 1년 전인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한국 미술의 세계화의 상징적 사건으로 보고 매우 흐믓해 한 것 같다. 당시 프랑스 르몽드지도 이 한국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에 예상밖 질투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사실 비엔날레 없다. 파리 비엔날레 35세 이하만 참가할 수 있는 젊은 실험 세대를 위한 것이었고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자크 랑이 지방화를 시도하면서 리옹 비엔날레가 생겼다 세계3위 비엔날레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자랑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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