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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50대 (1982-91)

[백남준]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야기 2024.04.25

<백남준 포럼> 백남준 유치원 동창이자 수필가 이경희 선생(1932 생) 오늘 12시에 / 향년 92세로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삼가 머리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제 내 몸이 그렇게 안 좋더니 결국 이경희 여사가 귀천, 자택은 용인이지만 장례식장 어딘지 확인? 반포 성모병원 장례식장 / 발인 4월 27일 8시 / 문상 25일 12시부터 / 사진 상. 2013년 / 하.

귀천하신 이경희 여사

이은화 선생님(오마이 기사 제가 초대 / 미술 미술사랑 미술사람 사람 생생한 미술관 이야기 전 세계 누비다 / 미에 미쳐서 미를 나누려고 하는 미술 스토리 텔러) - 저의 소개(김형순 30세기를 산 20세기 인물이라  제 이야기 좀 이해가 안 될수도?/백남준 불가해한 작고 -대체불가능 작가/백남준 연재 2년 -유튜브 6개월 -백남준 / 포럼 6회 뉴욕 독일 1달씩 /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예술가 지루하지 않고 항상 새롭다 설렌다 / 애인보다 더 설렘/ 5차원 6개국 600년 살다 /부친과 인연/ 백남준 운이 좋았다. 도울과 비교/

<1959년 2001년> 1) TV비디오 아트와 2) 위성 아트의 창시자이고, 3) 레이저 아트의 개척자 4) 음악와 시간과 세계사상을 바탕으로 작곡(과 연주)을 하는 개념미술가이고 비디오 시인 등등 / 15세기 서양에 다빈치가 있다면, 20세기 동양에는 백남준이 있었다. 그런 새 역사를 쓰다.

[백남준 1991-2006] 
▲1991년 취리히 Kunsthaus Zürich `백남준 회고전'. ▲1992년 서울에서 춤의 해를 위한 백남준의 퍼포먼스공연비디오예술 30년 회고전(갤러리현대원화랑갤러리미건▲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황금사자상수상국현 휘트니순회전 1995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수상미국 뉴욕 프랫미술학교 학장 취임 강연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백남준 95' 전시회▲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 마비제5회 호암상 예술부문 수상제1회 '월간미술대상 수상독일 '포쿠스선정 '올해의 100대 예술가▲1998년 미국 프랫미술대학 명예미술학 박사일본 교토상 수상▲1999년 백남준 설치미술전(양평 바탕골 예술관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대통령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석좌교수. '아트뉴스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의 작가독일경제지 '카피탈선정 '세계작가 100인가운데 8위.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금관문화훈장2001년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등재 ▲2004년 투병 후 첫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 독일 베를린에서 '글로벌 글로브 2004' ▲2005년 '베를린에서 DMZ까지'(서울올림픽미술관) 참가 마지막까지 통일평화조국 염원 ▲2006년 마이애미에서 타계경기도 용인에 '백남준 미술관착공

<참고도서>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12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인류문명사 인류학적 텍스트, 데커와 리비어 유럽의 미술사가 백남준 에세이 인터뷰 아카이브 등 다양한 자료

<백남준 키워드> 박지연 교수(청운대)의 분석 국회발표

 

1941~1945년 동아시아 전쟁 상황 백남준(전쟁 세대) 09살부터 13살(경기 중 1학년)까지 상황 미국과 일본의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린 과달카날(1943년 3월 2일) 전쟁장 백남준 1977년(그의 나이 45세) 이곳에서 진혹곡(레퀴엠) 반전 퍼포먼스를 샬럿 무어먼과 함께 했다.

 

미국 무기 팔아 돈 많이 벌려고 하다 보니 세계 지도국의 권위를 상실하다. 미국 대학가까지 들고 일어나다 / 백남준 선구적으로 1960년대부터 이런 반전운동을 퍼포먼스로 실행했다. 그는 미국은 왜 베트남에게 졌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이 전쟁 이슈를 인류가 해결해야 할 큰 문제로 제기하다

 

[백남준] 만약 코리아에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쫄딱 망했다

 

[1부] 백남준 누구?  백남준 이야기 자체가 축제 어제 감시주사 맞고 1시간 못 잤는데 힘이 펄펄 나네요
백남준 나처럼 좋아하면 그렇게 에너지 넘치는 사람 됩니다

백남준 <10년마다 큰 변화가 있었다> 

 

'1932년(성장기)' 초부자 집에서 태어나고 보니 집이 3천 평이고 집에 캐딜락 수리공 10명 고용 / 이상한 현상

부친 백낙승 최초 재벌 메이지법대 니혼대 상경대 졸업
'1942년(10대)' 뭘 했나? 프랑스어를 독학, 누이의 피아노 공부를 보면서 혼자 연습과 작곡 / 중간에 맑스를 접하면서 1945년(경기중 1학년) 당에 가입 /
'1952년(20대)'
동경대 공부 쇤베르크 연구 /
'1962-3년(30대)' 독일에서 첫 전시 TV 혁명(TV아트로 서양미술 추방-서양미술사 해체, 서양미술사에는 TV가 없다) / 뉴욕 도착 1964-1974년까지 빈민생활 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리다. TV 부처 나와 그를 죽음에서 구원/ 뉴욕에서 거의 빈민 생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다

백남준 1964년 이후 10년간 뉴욕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 걸리다) /

 

그 중간인 60년대와 70년대 사이인 1968-1979년 11년간 4차 산업시대 대비해 박사 논문 쓰듯 리포트 작성하다. 그의 생애 가장 치열하게 공부한 시기

 

'1973-1974년(40대)' 유튜브와 인터넷 아이디어를 내다 그해 TV 부처와 TV 정원(왜 대표작) 발표로 백남준 초대박 뉴욕미술계 지축을 흔들다. /

'1983-1984년(50대)' 굿모닝 미스터오웰 위성아트 실천(굿모닝 미스터 오웰 발표 제작비 2억 이상 기부) 다시 설명하지만 80년대 첨단 위성기술로 전쟁용 핵무기 대량 생산에 열받은 백남준 위성아트로 지구촌 원활한 소통과 세계평화 추구, 또 빅 부라더 감시처벌 사회 대안제시/

'1993-4년' 베니스 최고상 받고 인터넷 상용시대 열다 / 중간인 2000년 21세기를 열면서 그의 모든 예술을 뉴욕 구겐하임에서 총망라해 보여주다. 또한 2000년 77개국에 뉴밀레니엄 시대에 <호랑이는 살아있다> 위성아트를 보내다. 그렇게 전 세계를 호령하는 21세기 한류 예언 /

'2003-4-5년(60대)' 레이저아트를 더 업그레이드 / '베를린에서 DMZ까지'(서울올림픽미술관) 참가 마지막까지 통일평화조국 염원

 

[2부] 만약 코리아에 백남준 없었다면?

 

*백남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가 서양미술에 삼켜 먹힐 뻔했다
서양미술 공세가 원자폭탄급이라 / 그들보다 더 센 핵 원자폭탄급이고 그들을 훨씬 뛰어넘는 방어막인 백남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에 대한민국(영국식으로 하면 Great KOREA)에 백남준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쫄딱 망했다(Totally screwed) / 아직 대한민국에는 세계적 철학자가 한 명도 없지만 / 철학자보다 더 위대한 예술가가 있었다 / 백남준 같은 세계 최고의 예술가가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 이것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큰 행운이다 / 하지만 대한민국이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이 하나도 없다 / 오히려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

 

백남준과 비슷한 사건 나열

1마찬가지로 만약 '홍익인간'(두루 넓게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돼라)을 건국이념으로 제창한 스키타이 '단군'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

2전 세계 불교를 총망라한 '팔만대장경'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

3도자기의 진원지인 중국보다 더 하이테크 한 기술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가 없었으면 어찌할 뻔했나 /

4고려 시대 만약 새로운 1000년을 연 "직지(금속 활자)'가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

5한 개인(세종)이 만든 세계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최고의 디지털 언어인 '한글'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 이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

6이순신 거북선과 조선의구하는 기적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7조선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조선실록'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 대한민국 역사는 불가사의한 일

 

8그중에서 아무것도 없는 식민지 시대 대한민국이 백남준을 낳았다는 건 가장 위대한 일이다 /

 

9  백남준 1기 1963-4 혁명기 /제2기 1973-4 도약기 /제 3기 1983-4 절정기 /제 4기 1993-4 완성기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앞으로 1000년이 지나도 이런 작품은 나오기 힘들다. 왜? 1월1일 그가 전 세계 최고의 예술가와 천재적 엔터테이너가 합작해서 만든 시로 오페란 연구 이 같이 전 지구를 하나로 연결하며 광활한 공간을 캔버스 삼아 거대한 회화, 우주 오페라로 연주한 위성 아트가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 이런 작품 창조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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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한국 설화와 위성아트 궁합?

 

백남준, 위성아트는 견우와 직녀 러브스토리에서 왔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의 DNA 천문학에 관심이 많다는 소리인가. 앞으로 우리도 인공위성 기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지금 중국이 가장 잘 나가고 있다. 이제 앞으로 내 폰이 인공위성이 되는 시대가 온다.

 

한국은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천문학의 나라다

 

1 한국은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천문학의 나라다. 조선에서 아침 朝라는 한자를 보면 <해와 달과 별들>이 들어 있다. 백남준은 바로 천문학의 후손답게 <천문학적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해서 <견우와 직녀의 설화(동화 서의 극적인 만남)>를 바탕으로 그것을 예술화했다 그것이 바로 위성아트다. 위성아트의 정신을 바로 초국가적으로 초연결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구촌에 인류공동체(참여와 나눔과 공유와 연대를 극대화하는 코뮌세상) 건설하는 것이다

 

 

2 <백남준 연결-연결-연결 초연결 다시 말해 지구촌 인류공동체 연대와 연합 중시> 백남준과 뒤샹을 비교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뒤샹은 오브제(OBJET TROUVÉ)를 가지고 최고의 지적 놀이를 한 위대한 예술가지만 백남준은 스케일이 다르다. 그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 제목에도 아침 朝가 들어가다)>에서 한국인의 천문학 상상력을 가지고 우주를 하나의 캔버스로 삼아 거기에 전 세계방송채널을 연결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쉽게 빠르게 저비용으로 서로의 정보와 지식을 나눌까 고민해서 만든 것이 바로 위성아트 우주오페라(OPERA)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동서의 문화와 언어와 사상과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넘어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로 공존하면 지식과 정보를 공유(SHARE) 사회를 꿈꾸었다. 이것이 결국 인터넷이 된 것이다.

 

3 백남준은 1984년 1월 1일, 천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주를 캔버스로 삼고 전 세계 방송 채널을 연결하면서 지구의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Nam June Paik a utilisé son imagination astronomique pour peindre un tableau gigantesque de la Terre, en utilisant l'univers comme toile et en connectant les chaînes de diffusion du monde entier le 1er janvier en 1984. - 장 폴 파르지에

 

4 백남준은 우주라는 '공간'을 위성아트라는 '기념비적 장소'(전자 캔버스)로 만들다. 위성아트의 원리(?) 백남준 이후 위성아트를 이어가는 예술가를 찾는 다. 당사자들이 모험을 하고 있던 미술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예술이었다. 이것을 공유하기 다시 하기 어렵다는 것은 1984년 1월 1일을 다시 돌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 특이한 전 세계 스타 예술가들이 다 한자리에 모이게 있었습니다. 이런 카리스가 없어 마가 따로 나에게 안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예술가는 백남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의 독특한 신비한 친밀성(친화력) 때문입니다.

 

5 백남준은 우주라는 '공간'을 위성아트라는 '기념비적 장소'(전자 캔버스)로 만들다. 위성아트의 원리(?) 백남준 이후 위성아트를 이어가는 예술가는 드물다. 그만큼 대단한 모험이자 획기적인 아트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시간예술이었다. 이것을 다시 재현하기 힘든 것은 1984년 1월 1일을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 세계 스타 예술가들을 다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카리스마가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예술가는 백남준 한 사람밖에 없다. 이것은 그의 놀라운 천재적 재능인 친밀성(affinity) 때문이다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같은 작품은 1000년 안에 다시 나오기 힘들다)>의 시나리오 백남준 19835월에 썼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의 예언이 맞았다 "가장 어려운 일은 11(전 세계 최고) 스타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백남준의 천재성이다. 그에게는 확실하게 사람을 끌어모으는 놀라운 위력이 있다. 21세기 철학의 최고 테마인 '친밀성(Affinity)'의 이슈를 능수능란하게 실천한 것이다 / If you have an affinity with someone or something, you feel that you are similar to them or that you know and understand them very well.

 
 
1977년 이 작품(위성 원격 생방송), 1984년 위성아트 굿모닝의 모태 되다 //
백남준, 제 6회 독일 카셀 도큐멘타 <위성 원격 생방송>, 1977, 비디오, 컬러, 사운드, 29분 11초 1984년 위성 아트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모태가 되는 작품

[4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rwell) 은 새해 첫날 WNET New York에서 2,500만 명의 시청자에게 방송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위성 설치입니다. 그는 예술가 John Cage, Merce Cunningham, Peter Gabriel Joseph Beuys와 함께 참여했습니다. En. 1984, Good Morning, M. Orwell est diffusé le jour de l'an sur la chaîne WNET New York devant 25 millions de téléspectateurs. Il s'agit de la première installation satellite réalisée au monde. Il y participe avec les artistes John Cage, Merce Cunningham, Peter Gabriel and Joseph Beuys.

 

백남준 재치 홍보능력] 백남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위성아트를 앞두고 백남준이 홍보용으로 찍은 1983년 작품 이 작품을 하는데 40만 달러가 들어갔는데 록펠러 17만 달러 지원 외에는 백남준 개인 돈으로 하다 보니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하여간 이 우주 쇼에 돈이 필요했고 이런 기획사진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백남준이 그렇게 많은 사진을 남긴 것은 그가 비디오아티스트 이상으로 해프닝아티스트라는 증거가 된다 백남준의 사진연출력 역시 천재적이었다. 이보다 더 멋진 홍보영 사진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전자안경 하나와 지구본 2개로 완전히 분위기를 압도하다 Presentation of Good Morning Mr. Orwell, at the Kitchen Gallery, New York, on December 8, 1983. Photograph © 1983 by Lorenzo Bianda

 

[5부] 왜 1984년에? 반전(Anti-War)

 

[추신] 1 [1980년대 백남준 평화를 위한 투쟁 // 1980년대 스타워즈가 상징하듯 경쟁적으로 핵탄두 미사일이 개발되고 첨단기술이 전쟁용 무기로만 쓰이자 백남준 열받았다. // 1984년 이를 역으로 초국가적으로 초소통방식인 위성기술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예술을 펼치다]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첨단 기술이 주로 전쟁과 무기 개발 등 군사적 목적을 위해 개발되었다. 그때는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보편화되지 않았기에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우편이나 전화를 사용하거나 혹은 직접 만나야만 했죠. 그런데 40년 전, 소통을 목적으로 위성기술을 사용한 아티스트가 나타났다. 백남준은 뉴욕, 파리, 그리고 한국을 잇는 세계 최초의 위성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선보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없애고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했다. 기술을 평화의 목적으로 사용한 예술의 시작이었다.

 

[반전] [데뷔 20년 만에 백남준이 세계를 호령하는 문화칭기즈칸으로 거듭나게 한 그의 최대 성공작백남준은 1984년 한국의 군사정부 절정기에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소개했는데 당시 정부가 그걸 받아들인다그것을 당시군사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한 것인데 그들은 전혀 몰랐다 그의 친 고등사기가 군사독재시대에도 통한 것이다예술로 치는 정치사기는 이렇게 교묘하고 놀랍다백남준은 음악과 미술을 융합하는 새로운 TV전자아트를 창안했는데 사실 이게 거의 불가능한 것을 한 것이다 그래서 천재로 불린다굿모닝 미스터오웰도 마찬가지다 대중(엔터테인먼트) 예술을 고급스러운 예술로 바꾸고 고급예술을 대중의 언어로 잘 번역하여 역시 친근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이 또한 참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실험인데 성공했다

 

예술에서 저급과 고급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오히려 두 관계를 상생의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에는 엄청난 정치적 메시지가 깔려 있다 푸코에 평생 연구에 감시와 처벌의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 그런 굴레를 벗어나 보다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이 살을 살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1984년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리면서 신냉전시대였고 1985년 독일에 벡 교수는 위험사회를 발표하기도 했다백남준 당시의 비관주의 적 세계관을 뚫고 보다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폈다 바로 소통과 참여다 이런 개념은 바로 인터넷과 SNS를 낳았다지구촌을 하나로 만든 것이다지금도 이런 시도는 힘든데 백남준은 30년 전 이를 성공시킨 것이다. 63년 음악의 전시로 데뷔 73년 TV부처 84년 굿모닝으로 그는 20년 만에 그의 모든 예술을 종합한 이런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전자아트는 위성아트로 도약하게 되고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로 끌어올리기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된다

 

<1977년 과달카날 섬은 서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세계 2차 대전 격전지)에서 무어먼과 반전 평화 퍼포먼스를 벌이고 그것의 우주적 확장이 목적> 1984년 백남준 위성아트의 변 “칼과 피, 고통과 증오, 살육과 침략으로 얼룩진 전쟁으로서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 마음과 가슴, 가슴과 기술을 한데 묶어 세계를 정복하는 나만의 칭기즈칸을 세상에 내놓겠다.”

 

추가 <백남준 198411일 우주 미학, 디지털시대, 인터넷시대를 선언하다>

멀티 시간과 멀티 공간의 심포니

 

1984년 위성아트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creating a multi-temporal and multi-spacial symphony) 일종의 전 세계 방송의 정보와 뉴스가 하나하나 악기가 되어 총체적으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라고 본 것이다. 백남준은 거기서 총감독 총 지휘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흔히 '우주 오페라'라고 한다. 백남준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 직전 1993년 겨울에 "이제 우리에게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Pour nous, le XXl e siècle commencera le 1er janvier. / For us, the twenty-first century will begin on January 1st.)"라고 선언했다.

 

[6부] 왜 위성아트를?

TV비디오와 인터넷 중간단계 위성아트

 

<백남준 1984년 위성아트로 저비용 고소통방식의 예술을 추구하다 ㅋㅋㅋ> 1983년 8월 백남준은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었던 존 케이지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을 시작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노먼 메일러

 

"당신과 보이스가 미국과 유럽 양 대륙을 사이에 두고 인공위성 중계를 통하여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가령 시몬 드 보부아르와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1923-2007: 미국의 유대계 소설가·평론가 뉴저지 주 롱브랜치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후 1944년 제2차 대전으로 레이테와 루손 섬의 전투에 참가했다. <나자(裸者)와 사자(死者)>에서 군대란 조직의 악(惡)을 통렬히 묘파 하고, 반전사상을 표명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철저한 평화주의자로서 반전운동가 맔시스트)와 실존의 문제를 놓고 벌이는 인공위성 대담장면을 상상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양 대륙 사이에 하늘이 가로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고작 몇 백 명을 앞에 놓고 하루 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의 공연물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명의 동유럽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

 

왜 생방송?

 

또한 이 혁명은 '기동성(움직이는 전자회화)'과 '즉시성(리얼타임)'이 특징이다. 붓이나 물감대신 TV로 표현하는 예술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패러다임이 엄청나게 바뀌는 시대에 맞게 인식을 넓혀주고, '텔레토피아'라는 이상사회의 단면도 제시한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그의 연구가 리비어와 인터뷰(1974)에서 "이제 혁명의 시대는 가고 예술의 시대가 왔다". 68 혁명 이후 바리케이드시대는 지났다. 다른 사람이 헬리콥터나 위성을 소유하는 상황에서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제는 저항운동도 예술적이라야 한다"며 우리 시대는 예술가가 진정한 혁명가 천명

 

1983년은 첫 '위성아트' 위한 폭풍전야

 

[1] 50살이 된 1982년 백남준은 이렇게 뉴욕과 파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전 지구적으로 충격을 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런 면에서 1983년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한 '폭풍전야'와 같은 해라 할 수 있다./백남준은 이미 'TV'를 예술화했지만 이번에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예술을 상상했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아했다. 그래서 그해 8월 백남준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 케이지를 찾아가 그들 설득한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막을 이용우 미술평론가가 글로 남겼는데 그걸 여기 소개한다. [2] 백남준은 <예술과 통신> 전시 도록(현대화랑 1995)에 '별들의 랑데부'라는 글에서 '칠월칠석'에 황소를 끄는 총각 별 '견우'와 베를 짜는 처녀 별 '직녀'가 여름밤 꿈 같이 만났듯 동서가 그렇게 랑데부하는 이야기로 번안했다고 밝힌다. 이런 전설은 백남준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 백남준은 50대 초반인 80년대 전반기에 19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과 1982~1983년 퐁피두센터 회고전, 1984년 위성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을 연이어 발표해 전성기를 맞는다. 뉴욕, 파리에 이어 서울에서도 세계적 작가로 떠오르다. 백남준은 그의 연구가인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진실로 난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실험미술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인데 마침 뉴욕 보니노갤러리가 운 좋게 그를 받아줘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당시로는 상업성이 없는 실험미술인 전자예술(Electronic Art)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1983년 여름 어느 날 백남준이 찾아와 다짜고짜 하는 말이 내년 1월 1일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 오웰에게 한수 가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인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TV쇼를 하겠다고. 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그 짧은 시간 내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말렸죠. 그런데 그는 이미 프랑스채널(FR) 3 TV와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고 퐁피두센터와도 프로그램 대한 결정을 해놓고 있었어요. 나는 영락없이 백남준에게 걸려든 셈이 됐어요." 위성아트는 멀티 공간, 멀티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백남준] 굿모닝 Mr. 오웰, '견우와 직녀'에서 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아직 좀 멀었다.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우리의 설화인 '견우와 직녀'에서 영감을 받았다. 위성아트의 상상력은 어디서 왔나?

 

 

 

<6> <굿모닝 미스터오웰> "21세기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 감시사회 대안

[1] <1984년>"당신과 보이스가 인공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소설가)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 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야심작을 성사시키려 인사들을 두루 만났고 그중 미국방송(WNET) 프로듀서인 '캐럴 브란덴버그'도 있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왜 생방송인가?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왜 백남준은 화면이 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이 '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을까? 1987년 그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에베레스트나 알프스빙벽에 도전하는 이유가 위험한 것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열정 때문이 아닌가. 프로메테우스와 콜럼버스 이래, 이런 열정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라고 대답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걸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그게 아방가르드 정신인데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작가적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는 60년대 초부터 '미래의 빛(A Satellite)'이라는 뜻이 담긴 '위성'을 가지고 예술을 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미래를 사유하는 자로서 경계 없는 지구촌을 그려왔다.

 

<2>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감시와 처벌 사회 대안 공동체 <굿모닝 미스터오웰 > 전시장에 소개된 감시사회(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을 합성한 것임. 영국의 민주사회주의자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 1946년부터 2년간 쓴 차용한 것인데, '빅 브라더(Big Brother 가상의 독재자)'가 나타나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담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3] 미술사에 유래 없는 기념비적 사건 '2천5백만을 위한 예술(Art for 25 mill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4년 11월 28일부터 12월 9일까지 베를린 '다아트갤러리(DAADgalerie)'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초대용 포스터 우여곡절 끝에 1984년 1월 1일 뉴욕(정오), 샌프란시스코(오후 3시), 파리(오후 6시)를 동시에 연결해 한국, 일본,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 11개국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로 송출했다. 이는 세계미술사에서 유래가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위성오페라 쇼로 백남준은 명실 공히 세계적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4] 이 프로젝트는 뉴욕에 있는 '공영방송(PBS/WNET)'이 주관했는데 당시 방송제작자 중 누구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거라 긴장했고, 뉴욕과 파리의 위성을 잇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화면이 자주 끊겨 환희와 실망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시청률이 초반에는 7%까지 올라가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위성 쇼는 뉴욕의 사회자인 플림튼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신을 만날 시간이네요. [...]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TV는 우리의 뇌를 먹지요, 하지만 조지, 당신은 오버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것은 아직도 남아있어요, 봐요, 당신은 좀 틀렸군요"라는 멘트로 시작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오웰의 생각이 반만 맞았다며 그의 '빅 브라더'론을 조롱했다. 하긴 오웰의 예측이 다 틀린 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형편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첨단미디어기술'이 개발되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쌍방소통이 가능할 거로 낙관했다. 그러나 오웰은 '인터넷-SNS시대'가 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했다. [6] 백남준은 프로젝트 방영 후에도 빚 갚느라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 개인파산을 전제로 부채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1984년 6월 귀국했을 때 만난 유치원친구 이경희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그 빚을 갚는 데 조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려 했으나 그런 한국 돈은 쓸 수 없다며 간곡히 거절한다. 또한 이런 '참여와 소통' 방식은 '오웰'이나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사회 그리고 그 이전에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와 착취'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킹 방식은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한 식구라는 묘한 연대감을 주며 평등하게 참여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해 주었다. 그때 백남준은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놀라운 말을 던진다. 그는 20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연 셈이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를 꿈꾼 지 20여 만에 세계를 호령하며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문화칭기즈칸'이 됐다.

 

 

중계여부가 결정되자 백남준에게 이번엔 제작비 40만 달러가 문제였다. 록펠러재단에서 17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나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자 아이디어를 내 케이지, 보이스, 커닝행, 긴즈버그가 만든 판화를 만들어 팔아 7만 달러를 충당했다. 이밖에도 서울 원화랑 정기용 사장이 4만 달러를, 프랑스방송과 KBS 등에서도 협찬했다.

 

[6] 홍익인간 백남준의 헌신

 

<백남준 빚 갚을 걱정으로 죽을 지경이다. 비행기 안에서> // "빚 갚느라고 혼났어,〈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내가 돈 들여서 만든 거야. 15-20만 달러(2억 5,000만 원)를 들였지. 그동안 벌었던 돈 다 쓰고 빚 얻어서. 5월 15일까지 1만 5,000달러를 갚지 않으면 고소당하게 됐는데 마지막까지 돈이 안 돼서 혼났어. 이제 다 갚고 200달러 남았어." - 백남준 // 천하 바보 백남준 자기 하고 싶은 작품 하다 보니 어마어마한 빚쟁이 되다. 국가도 하기 힘든 프로젝트를 개인이 하니. 돈 없는 백남준이 하긴 그게 백남준 스타일, 불가능을 가능하게

 

1984년 백남준이 비행기 안에서도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는 모습. 2014년 방송된 <KBS 파노라마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 백남준 2편 : 디스토피아를 넘어서>의 한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 다시 작품이야기로 돌아가 백남준은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란 경계를 흐리게 했다. 그래서 대중예술가와 고급예술가를 번갈아 등장시켜 동급으로 놓았고 '대중 쇼' 방식을 취했다. 이 난제는 누구도 풀기 쉽지 않은데 백남준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춤, 노래, 코미디, 퍼포먼스 등을 융합하며 탈장르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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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0년 만에 백남준이 세계를 호령하는 문화칭기즈칸으로 거듭나게 한 그의 최대 성공작 대표작]

 

 

[프랑스 '르몽드'지] 백남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이 발표되자 이에 대해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 지는 <전자(테크놀로지) 아트가 폭발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놀랍고도 기상천외한 작품이라고 극찬하다.

 

백남준은 1984년 한국의 군사정부 절정기에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소개했는데 당시 정부가 그걸 받아들인다. 그것을 당시군사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한 것인데 그들은 전혀 몰랐다 그의 친 고등사기가 군사독재시대에도 통한 것이다. 예술로 치는 정치사기는 이렇게 교묘하고 놀랍다. 백남준은 음악과 미술을 융합하는 새로운 TV전자아트를 창안했는데 사실 이게 거의 불가능한 것을 한 것이다 그래서 천재로 불린다. 굿모닝 미스터오웰도 마찬가지다 대중(엔터테인먼트) 예술을 고급스러운 예술로 바꾸고 고급예술을 대중의 언어로 잘 번역하여 역시 친근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또한 참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실험인데 성공했다. 예술에서 저급과 고급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오히려 두 관계를 상생의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에는 엄청난 정치적 메시지가 깔려 있다 푸코에 평생 연구에 감시와 처벌의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 그런 굴레를 벗어나 보다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이 살을 살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1984년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리면서 신냉전시대였고 1985년 독일에 벡 교수는 위험사회를 발표하기도 했다. 백남준 당시의 비관주의 적 세계관을 뚫고 보다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폈다 바로 소통과 참여다 이런 개념은 바로 인터넷과 SNS를 낳았다. 지구촌을 하나로 만든 것이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힘든데 백남준은 30년 전 이를 성공시킨 것이다. 63년 음악의 전시로 데뷔 73년 TV부처 84년 굿모닝으로 그는 20년 만에 그의 모든 예술을 종합한 이런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전자아트는 위성아트로 도약하게 되고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로 끌어올리기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된다

 

[프랑스매체]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에 대한 백남준 인터뷰

1) 프랑스 편(Liberation 매체) 여기서 백남준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을 비빔밥으로 만들겠다는 강한 포부를 보이다) "TV는 미술시장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술만큼 훌륭한 미디어가 없어요. 그러나 TV는 예술을 이용할 줄 모릅니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고급 예술과 록 음악 같은 대중 예술 사이에 간극이 있는데 여러 연애물을 소개하는 버라이어티쇼 방송조차 이 둘은 적절하게 혼합하지 못하지요. 제가 그걸 하렵니다" -1983.12.31 백남준, 프랑스 리베라시옹 신문과 인터뷰 // 2) 한국 편"(KBS 매체)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세계 최초의 쌍방향 방송이다. 나는 이것을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자랑할 수 있다. TV문화는 레이더로 시작되었으며, 레이더는 쌍방향이다. 즉 TV는 쌍방향에서 시작된 것이다",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 시작되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1)"백남준은 세계 미술사에서 하늘(우주)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린, 오페라를 연주한 첫 예술가다" <지금 한국의 20세기 네오나르도 다빈치 백남준을 미국과 독일과 일본이 호시탐탐 자기 나라 작가라고 노리고 있다. 이러다 백남준 빼앗기겠다. 백남준은 인터넷 개념 창제로 1000년을 새로 연 대 예언자(global visionary)였다. 대한민국 정신 좀 차려라!!!> // [22세기는 바로 오늘부터 시작한다] <1984년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40주년(1984~2024) 맞아 내년 첫날인 2024년 1월 1일 광화문 광장 역사박물관에서 지금보다 훨씬 큰 대형 스크린으로 방영해야 한다. 1984년 백남준 작품의 오리지널을 살리되 최근 NFT, 메타버스, 뉴미디어 기술을 합쳐 전 세계에 방영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백남준 작품이 임팩트가 없다고 하는데 이번에 한번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백남준은 1984년 캔버스로 전 세계를 연결해 우주로 확장한 천상에서 전자 오페라를 그려낸 것이다. 엔터테인먼트와 하이아트를 반반씩(백남준 주특기)으로 살려낸 것이다. 당시에 최고 대중예술가와 고급미술가가 총출동한 지구상에 한 번도 없었던 최고의 우주쇼였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1984년 1월 1일부터 21세기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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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21 <1982 미국에서 성공  1982년 프랑스에서 성공 / 세계적으로 성공>

-50대 전반기, 세계적 작가로 부각(1980~1984)

 

백남준은 50대 1982년 휘트니미술관 1982~1983년 퐁피두센터 회고전, 1984년 위성아트 첫발을 내디딘 '굿모닝 미스터 오웰'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기념적인 작품 발표해 전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며 스타덤에 오리면. 뉴욕, 파리, 쾰른, 동경, 서울에서 세계적 작가로 부가된다. 마침내 35년 만에 감격적인 고국을 방문한다.

 

80년 '인터넷' 예고, 82년 '휘트니' 회고전 성공

 

[01] 기사 관련 사진

□ 백남준 I '비라미드(V-yramid)' 대형·소형 TV 모니터 40여 대 1982년 이 작품은 휘트니미국비엔날레 소장품으로 그의 TV연작을 총망라한 '비디오조각'의 진면목을 보여주다.(왼쪽) 이 작품은 1988년에 이걸 더 업그레이드시킨 ‘다다익선’ 1003개 TV(개천절 의미) 1988 (오른쪽) 업그레이드된다. 이 사진은 저자가 2015년 6월 20일 휘트니미술관을 방문하고 찍은 사진이다

 

 

그해 가을, 백남준은 또 베를린 국제무선전신엑스포에 레이저기술자 '호르스트 바우만'과 함께 비디오작품인 '레이저 비디오 공간 1'을 출품해 '레이저아트'를 처음 시도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그 후 오랫동안 자금과 여건이 안 돼 미뤄오다가 2000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완성도 높은 레이저아트 '야곱의 사다리' 등을 선보였다.

 

1982년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는 '백남준 대규모 회고전'이 성황리에 열렸다. 이 전시에서 32대 컬러 TV과 8대 흑백 TV로 만든 비디오조각 '비라미드(비디오+피라미드 합성어)'가 발표되는데 호응이 좋았고 이를 계기로 이 미국미술관 소장품이 돼 백남준의 새 미국시대를 열었다. 이 작품은 후에 '다다익선'으로 재탄생한다.

 

백남준은 이 전시를 더 홍보하기 위해 인기가 없어진 '로봇 K-456'을 이 미술관 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하는 해프닝은 벌려 당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또한 그해 5월 이 미술관에서 당대 유수한 미술관관장들이 모여 백남준의 미술사적으로 재평가하는 '토론회'도 열려 '비디오아트'란 새 장르의 위상이 더 확고해졌다.

 

일찍이 백남준의 재능을 발굴해 그를 연구하고 전시해 온 큐레이터 '핸하르트', 그는 휘트니전 전시도록에서 백남준에 대해 "통찰력을 가지고 비디오아트를 연 개척자로 미적 표현의 새로운 비전과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는 또한 비디오분야만 아니라 퍼포먼스, 작곡에도 일가를 이뤘다"라고 평가했다.

 

1982~1983년 '퐁피두' 회고전 성황

 

[02] 기사 관련 사진

□ 백남준 I '삼색 비디오(Tricolor Video)' 1982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선보인 대형작품. 2014년 2월 1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백남준문화재단 주최)에서 '라티고'교수가 설명할 때 쓴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백남준은 또 미국뿐 아니라 70년대 말 독일 뒤셀도르프 조형대 교수가 되면서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미국에서 백남준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를 알린 '핸하르트'가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소르본대 영상학 교수인 '장 폴 파르지에(J. P. Fargier)'가 있었다. 그는 백남준을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라며 극찬했다.

 

'파르지에'는 1982년 백남준 퐁피두센터 개인전을 앞두고 1981년 백남준의 사상적 기원(L'Arche de Nam June 22분)'이라는 인터뷰영상을 제작한다. "'색(color)'이란 시간을 뜻하고, 섹스를 뜻한다"라는 백남준의 말로 시작하는 이 대담에서 한 발언은 단순하나 깊이가 있고 파격적이라 당시 프랑스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백남준은 '자아형성·사랑과 금전·시간과 공간'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원이 된 맑스는 물론 그의 예술적 이론과 실천에 큰 영향을 준 맥루한, 케이지, 보이스, 마치우나스 그리고 프랑스소설가 스탕달과 시인 발레리 등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놓아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퐁피두센터에서 1982년 12월 15일부터 1983년 4월 11일까지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렸다. '파랑·하양·빨강' 프랑스국기를 '전자국기로 변형한 '삼색 비디오(Tricolor Vidéo)'를 선보였다. 256대의 컬러 TV와 128대 흑백 TV(총 384대)와 8개 비디오테이프가 오색찬란한 영상을 연출해 이곳 전시장 한 코너를 점령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전시에서 "나는 TV 안에 인간의 뇌를 심고 싶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작품설명을 하면서 예술과 일상을 반반씩 뒤섞었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예술에서 대중의 참여와 취향이 매우 소중함을 피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영국에서 유행한 '일상으로 내려가는 예술(down to earth)'과도 일맥상통한다.

 

김광우 미술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헝가리출신의 프랑스조각가 니콜라스 셰퍼(N. Schaffe 1912~1992)는 레이저로 쏘아 300m가 넘는 인공두뇌조명탑을 세워 프랑스국기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으나 그의 아이디어가 물리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걸 비디오아트로 구현해 프랑스인에게 흡족함을 줬단다.

 

[추가] 백남준 I '하늘을 나는 물고기(Fish Flies on Sky)' 3 채널이동식 설치작품 1983-1985. 2010년에 열린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백남준회고전 ⓒ Nam June Paik Estate Museum Kunst Palast, Dusseldorf ⓒ Nam June Paik Estate

 

백남준은 여러 장르의 예술을 혼합하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서로 다른 것을 잘 섞어야 제 맛이 나는 '비빔밥' 원리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이런 미학은 시공을 초월해 동서양의 차이와 유목과 농경문화도 뒤섞는다. 또한 관객의 참여와 매체 간 소통을 통해 이를 구현한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를 보면 다매체를 잘 비벼 천진한 동심과도 소통하고 있다. 비빔밥은 서로 다른 걸 섞어 시너지 효과를 내는 음식이다. 왜냐하면 비빔밥은 서로 다른 재료가 다양하게 많이 들어가야 맛이 더 나기 때문이다. 소수정당의 다양한 의견도 비중 있게 받아들여 대통합의 정신을 살린다면 나중에 후유증이 없이 진정 하나가 될 수 있다.

 

1983년은 첫 '위성아트'를 위한 폭풍전야

 

50살이 된 1982년 백남준은 이렇게 뉴욕과 파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전 지구적으로 충격을 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런 면에서 1983년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한 '폭풍전야'와 같은 해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은 이미 'TV'를 예술화했지만 이번에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예술을 상상했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아했다. 그래서 그해 8월 백남준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 케이지를 찾아가 그들 설득한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막을 이용우 미술평론가가 글로 남겼는데 그걸 여기 소개한다.

 

"당신과 보이스가 인공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소설가)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야심작을 성사시키려 인사들을 두루 만났고 그중 미국방송(WNET) 프로듀서인 '캐럴 브란덴버그'도 있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83년 여름 어느 날 백남준이 찾아와 다짜고짜 하는 말이 내년 1월 1일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 오웰에게 한수 가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인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TV쇼를 하겠다고. 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그 짧은 시간 내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말렸죠. 그런데 그는 이미 프랑스채널(FR) 3 TV와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고 퐁피두센터와도 프로그램 대한 결정을 해놓고 있었어요. 나는 영락없이 백남준에게 걸려든 셈이 됐어요."

 

[04] 기사 관련 사진

□ 1984년 백남준이 비행기 안에서도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는 모습. 2014년 방송된 <KBS 파노라마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 백남준 2편 : 디스토피아를 넘어서>의 한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 ⓒ 화면 캡처

 

중계여부가 결정되자 백남준에게 이번엔 제작비 40만 달러가 문제였다. 록펠러재단에서 17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나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자 아이디어를 내 케이지, 보이스, 커닝행, 긴즈버그가 만든 판화를 만들어 팔아 7만 달러를 충당했다. 이밖에도 서울 원화랑 정기용 사장이 4만 달러를, 프랑스방송과 KBS 등에서도 협찬했다.

 

백남준은 프로젝트 방영 후에도 빚 갚느라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 개인파산을 전제로 부채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1984년 6월 귀국했을 때 만난 유치원친구 이경희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그 빚을 갚는 데 조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려 했으나 그런 한국 돈은 쓸 수 없다며 간곡히 거절한다.

 

다시 작품이야기로 돌아가 백남준은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란 경계를 흐리게 했다. 그래서 대중예술가와 고급예술가를 번갈아 등장시켜 동급으로 놓았고 '대중 쇼' 방식을 취했다. 이 난제는 누구도 풀기 쉽지 않은데 백남준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춤, 노래, 코미디, 퍼포먼스 등을 융합하며 탈장르를 시도했다.

 

백남준은 당시 스타급 연예인과 예술가 100여 명을 그것도 1월 1일 한 곳에 모으는 초능력을 보였다. 뉴욕에선 '앤더슨, 긴즈버그, 무어먼, 케이지, 커닝햄' 등이, 파리에선 '사포, 보이스, 삭스, 팅겔리, 생팔' 등이 출현했다. 백남준은 전설적 전위무용가 '커닝햄'을 14년 만에 방송에 출현시켰고, '보이스'도 6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미술사에 유래 없는 기념비적 사건

 

[05] 기사 관련 사진

□ '2천5백만을 위한 예술(Art for 25 mill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4년 11월 28일부터 12월 9일까지 베를린 '다아트갤러리(DAADgalerie)'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초대용 포스터 ⓒ DAADgalerie ⓒ DAADgalerie

 

우여곡절 끝에 1984년 1월 1일 뉴욕(정오), 샌프란시스코(오후 3시), 파리(오후 6시)를 동시에 연결해 한국, 일본,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 11개국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로 송출했다. 이는 세계미술사에서 유래가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위성오페라 쇼로 백남준은 명실 공히 세계적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 프로젝트는 뉴욕에 있는 '공영방송(PBS/WNET)'이 주관했는데 당시 방송제작자 중 누구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거라 긴장했고, 뉴욕과 파리의 위성을 잇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화면이 자주 끊겨 환희와 실망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시청률이 초반에는 7%까지 올라가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위성 쇼는 뉴욕의 사회자인 플림튼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신을 만날 시간이네요. [...]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TV는 우리의 뇌를 먹지요, 하지만 조지, 당신은 오버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것은 아직도 남아있어요, 봐요, 당신은 좀 틀렸군요"라는 멘트로 시작한다.

 

이 작품명은 영국의 민주사회주의자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 1946년부터 2년간 쓴 소설제목에서 차용한 것인데, 이 내용은 1984년에 되면 '빅 브라더(Big Brother 가상의 독재자)'가 나타나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담겨있다.

 

그러나 백남준은 오웰의 생각이 반만 맞았다며 그의 '빅 브라더'론을 조롱했다. 하긴 오웰의 예측이 다 틀린 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형편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첨단미디어기술'이 개발되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쌍방소통이 가능할 거로 낙관했다. 그러나 오웰은 '인터넷-SNS시대'가 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왜 생방송인가?

 

[06] 기사 관련 사진

□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왜 백남준은 화면이 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이 '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을까? 1987년 그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에베레스트나 알프스빙벽에 도전하는 이유가 위험한 것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열정 때문이 아닌가. 프로메테우스와 콜럼버스 이래, 이런 열정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라고 대답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걸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그게 아방가르드 정신인데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작가적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는 60년대 초부터 '미래의 빛(A Satellite)'이라는 뜻이 담긴 '위성'을 가지고 예술을 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미래를 사유하는 자로서 경계 없는 지구촌을 그려왔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생방송'인 또 다른 이유를 추론해 보면 그건 바로 방송이 오웰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권력자에 의해 정보가 임의로 조작되고 왜곡·굴절되는 것을 최소화하자는 상징적 조치였고, 쌍방형 미디어로 소수인 '빅 브라더'가 대다수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하려는 걸 막자는 주도면밀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80년대 들어와 위성아트인 '굿모닝 미스터오웰(1984년)'로 70년대 TV코뮌에서 90년대 '전자 초고속도로로 이어지고 이는 바로 인터넷사회와 21세기 SNS도 낳았다. 기반이 된다 그래서 백남준은 공간예술을 확장하여 시간예술을 낳았고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의 기존의 시간개념 갇혀 사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시간을 편집하고 그 방향도 조율할 수 있게 했다.

 

'소통과 참여'는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07] 기사 관련 사진

□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에 소개된 그의 사진과 그의 어록(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을 합성한 것임.

이를 통해 백남준은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맥루언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시켰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 바로 백남준 예술의 핵심인 '참여와 소통'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누구나 즐기는 '댓글' 같은 게 백남준이 상상한 '참여와 소통'의 '에스페란토(국제어)'였다

 

이런 정신은 백남준이 60년대 가담한 '플럭서스' 운동과도 상통한다. 플럭서스 즉 영어로 'FLOW(흐른다)' 소통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세상을 염원하는 것인데, 백남준은 이런 발상으로 '인터넷' 없는 시대에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국경·인종·언어는 뛰어넘는 '인터페이스' 세상을 만들려 했다.

 

'굿모닝 미스터오웰'의 내용에서 동구권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굿 장면'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할애되는데 이는 백남준이 동서 간 정보결핍으로 발생하는 오해를 제거하고 서양이 동양을 사회문화적으로 깔보는 일을 없애려는 사전조치였다.

또한 이런 '참여와 소통' 방식은 '오웰'이나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사회 그리고 그 이전에 맑스가 말한 '소외와 착취'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킹 방식은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한 식구라는 묘한 연대감을 주며 평등하게 참여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해 주었다.

그때 백남준은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놀라운 말을 던진다. 그는 20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연 셈이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를 꿈꾼 지 20여 만에 세계를 호령하며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문화칭기즈칸'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 선보인 것이 1984년 1월 1일에 벌어진 위성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는 바로 이날이 21세기가 시작한 날이라고 선언하며 인터넷시대를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