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까지] 백남준 30살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백남준 아니라
유럽인(쇤베르크, 존 케이지, 플럭서스)이었다.
여기에 한계가 있었다.
[1963년부터] 백남준 31살 서양음악 해체 주동자 유럽인 아니라 백남준이었다
그런 면에서 1963년 세계미술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다.
이제 드디어 백남준 나서다.
1953(도쿄대 재학 쇤베르크 논문구상)-1963(첫 전시 TV)-1973(인터넷 유튜브)-1983(위성아트)-1993(베니스 황금사자상)-2003(호랑이 살아있다/뉴욕회고전(뉴욕을 점령하다)/록펠러센터 앞:레이저아트)
'백남준 30대 (1962-7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남준] 비디오아트, '반전사상'과 '반체제'와 '신기술'에서 시작 (1) | 2024.06.15 |
---|---|
[백남준] 진중권이 본 그의 '미디어 아트'론 - 백남준아트센터 (1) | 2024.06.05 |
[백남준] 1965년 연설하는 <인간화(휴먼화)된 로봇> 제안 (0) | 2024.05.29 |
[백남준] 운이 좋은 사람 그러나 실은 실력과 노력 있었다 (0) | 2024.05.25 |
[백남준] 호형호제하는 보이스, 어떻게 예술무당 되었나 (0) | 2024.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