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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1968-1979년 '인터넷(정보초고속도로)-유튜브' 착안 [아래 사진 백남준 1968-1979년까지 작성하는 모습 이 당시 백남준 제대로 먹지를 못해 영양실조(1964-1974)에 걸리다. 그만큼 힘든 시기였다] [PART 2 Transforming Video and Television: Media Art Practices] 백남준은 TV와 비디오 매체를 미디어아트라는 신 예술의 탄생을 가능하도록 변형시키다 // 뉴욕 소호 자택에서부터 위성 송신 무대까지, 예술에 대한 백남준의 강렬한 인본주의적 탐구는 인간의 정신을 알리고 즐겁게 하며 고양시킬 수 있었다. // 이를 위한 그의 70년대 노력은 Rockefeller Foundation 및 WNET의 Television Lab과 같은 기관의 지원을 받았으며 Shuya Abe, Allan Kaprow 및 Allen.. 더보기
[백남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전 세계적에 영향을 주다 PART 3 Culture and Politics: Local and Global // // 백남준은 혁신적인 예술 아이디어의 창작과 전시의 중심지인 로어 맨해튼에서 살면서 작업했다. 백남준은 이 뉴욕을 출발점으로 전 세계를 여행했고, 독일, 프랑스, 브라질, 멕시코, 한국, 일본, 이탈리아에서 현지 예술가처럼 인정받았다. 많은 국가와 문화에서 백남준은 그를 자기 나라의 예술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른 삶의 방식을 탐구했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생각과 예술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 Nam June Paik was an intensely political person. He understood how organizations work, which people held power, an.. 더보기
[백남준] 얼(정신), 얼음(정신 차려), 어른(정신 성숙), '얼'은 Media 즉 '굿' (영문) 포함 Media 中世신학의 개념으로 서신과 交流하는 手段, 모체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굿의 어원은 몽골어의 얼(정신자체)이니 Media와 굿이란 거의 같은 말이다."빛과 어둠(明暗)은 삶의 영원한 동반자이다! 무속의 굿(미디어)은 '어둠(暗)'을 수용하는 예술이고, 할리우드 미디어는 '빛(明)'을 향유하는 예술이다" Media 中世신학의 개념으로 서신과 交流하는 手段, 모체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굿의 어원은 몽골어의 얼(정신자체)이니 Media와 굿이란 거의 같은 말이다. 따라서 France의 Media가 멀리 한국의 굿을 취재하러 온 것은 자연이라면 자연스러운 형상이다. 보이스(Beuys)는 죽음에서 돌아와서 발언한 극소수의 인간 중 한 사람이다. 죽음이 싫으니까 우리는 갸웃이 넘보다가는 뒷걸음질한다. 공자.. 더보기
[백남준] 20대 이미 반가사유상(생불)이 되었다. 백남준 20대 반가사유상 그 신비한 분위기와 그 염화시중의 미소를 퍼포먼스로 완벽하게 연출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 -1000으로 사는 무소유주의자만이 할 수 있다 // 천재만이 할 수 있는 퍼포먼스다> // 백남준은 우리와 같이 살았던 생불이었다. 그러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여기 보면 백남준은 아직도 고뇌하는 모습이다. // 그 나이에 그는 사상가, 철학자는 될 수 있어도 명상가까지 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높은 경지까지 올라갔다. 반가사유상 그 신비한 분위기의 모습과 그 염화시중의 미소를 퍼포먼스로 연출하려면 -1000이라는 무소유주의자만이 할 수 있다. 백남준 20대 그걸 해 냈다. 백남준은 이미 그런 심경의 철학자였고 사상가였기에 충분하게 그걸 비디오아트로 구현해 낸 것이다. 그렇게 보.. 더보기
[백남준] '알타이(유라시아) 연합국가' United KOREA [알타이(유라시아) 연합국가] 남북연합한국 United KOREA(남북철도 당연 포함)+동몽골+남시베리아+헝가리 등등. 백남준의 1960+70년대 생각, 김대중은 80+90년대 생각 백남준 I "지도의 우화(Map Allegory from Crimea to Korea)" 불난 곳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남부 크림 반도다. 1960년대 백남준과 보이스, 에 대한 유토피아를 가지고 있었다. 더보기
[백남준] 한 미국학자는 중국이 서구를 1300년 간 앞섰다 [한 미국학자는 아시아(중국)가 서구를 1300년 동안 앞섰다 그러나 백남준 아시아가 서구를 1500~1600년 동안 앞섰다고 본다?] 최근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하트는 대담한 가설을 제시했다. 서기 2세기까지는 서양 문명이 중국 문화보다 더 발전되어 있었으나, 그 시점에서 발전 규모가 역전되어 중국 문명이 서양 문명을 따라잡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세계문명을 15세기까지 이끌었다. [참고 중국에서는 서기 105년 후한시대 화제(和帝)때 궁중의 물자 조달 책임자였던 채륜(菜倫)이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채륜이 제지술을 개량했던 서기 105년 경은 한나라가 한반도에 낙랑군을 비롯한 4군을 설치했던 시기였다. 이때부터 동양이 서양을 앞서다] 그러나 15세기부터는 서양이 다시 선두주자가 되었다. 마이클.. 더보기
[백남준 ]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1977년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1977년 백남준 45세 때 Tele-vion means in Greek to see far. See far=fernsehens Tele-vision // 왜 내가 Schoenberg에 관심을 가졌나까? 그가 가장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가장 극단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는지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한다. 그것은 내 몽골 DNA 때문이다. - 몽골-우랄-알테르 말등사냥꾼들은 선사시대에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를 거쳐 전 세계로 이주했다. 그들은 중국 농업 사회처럼 중심을 보지 않고 그들은 멀리 보았고, 멀리서 새로운 지평선이 보이면 더 멀리 가서 봐야만 했다. // My Jubilee(영어) ist Unverhemmet(독일어) [.. 더보기
[백남준] We are in open circuits Writing by N. J. Paik Essays, project plans, and correspondence from across Nam Jun Paik's career, much of it previously out of print or unpublished. 가격: 50달러 // 백남준(1932~2006)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틀림없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가장 영향력 있고 다작을 한 사람 중 백남준은 전자 동영상을 예술가의 매체로 변화시킨 전설적인 혁신가였다. 그는 친구들과 연락하고, 공연 악보를 작성하고, 텔레비전 프로젝트를 위한 제작 노트를 작성하고, 비디오 설치 계획 초안을 작성하고, 에세이와 기사를 쓰는 등 끊임없이 글을 썼다. 새로운 예술적 도구를 선구적으로 개발하고 비디오와 TV 분야에서 선.. 더보기
[백남준] 비빔밥(소프트웨어)의 미학-포스트산업시대 예술 비빔밥(소프트웨어)의 미학-포스트산업시대의 예술(1995) -백남준 // 상당히 긴 문장인데 앞부분만 살짝 소개하다. // 과거에 파인아트로의 미술은 경제생활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파생물, 장식으로만 여겨졌다. 예를 들어, 품위 있는 아들이 미술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방탕한 사람 취급하며 집 밖으로 내쫓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파인아트로의 미술은 경제사회의 원동력으로서 경제적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왜 코페르니쿠스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걸까? / 21세기를 살아남기 위해 / 하드웨어 자본주의'에서 '소프트웨어 자본주의'로 전환을 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Aesthetics of Bibim-bab [a rice hash]-The Art of Post Industry Era (1995) In.. 더보기
[백남준] 영어로 번역한 중국 고사성어 왕자를 따라 외국에 인질로 가게 된 신하가 있었습니다. 출발하던 날 그는 왕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왕께서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시장 바닥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왕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뒤에 다른 사람이 달려와 똑같이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약간 의심이 들겠지." 왕이 대답했습니다. 신하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만약 그 뒤를 이어 세 번째 사람이 들어와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왕은 그렇다면 믿게 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신하는 자신이 왕자를 따라 외국으로 가게 되면 이런저런 말로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셋보다는 많을 텐데 그런 말들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것처럼 근거.. 더보기
[백남준] 초기 그의 급진적 아이디어, 지금 세계 표준 되다 [1] 백남준에게 스크린은 감시와 중독이 아니라 놀이, 연결, 고급스런 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국제적인 창조적 협력과 발견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계화-동기화된 미디어 작동을 예측했고 참 비전을 제시하다. [2] 이번 전시는 백남준이 얼마나 최첨단에 있었는지 인식하기 위해 약간의 문화적 회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그 당시 급진적인 것이 지금은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제 동시 방송, 엔터테인먼트와 정치의 결합, 공연과 논평, 영화의 아이디어 또는 TV는 어디에서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예술 형식이다. - 영국 가디언지 Nam June Paik review – encounters with a true visionary A teeming retrospective of the Korean-Am.. 더보기
[백남준] 스카타이 단군과 홍익인간 단군이 생각한 홍익인간 두루 많은 사람들(우리나라만 아니라 인류가 포함된다)에게 넓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되라 홍익인간의 이념을 정보시대에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20세기이 등장하다 바로 백남준이다. 그는 비디오아트로 위성아트도 인터넷 아트로 전 인류가 원활한 소통을 통해 전쟁을 막고 세계 평화와 공존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예술을 펼쳤다 그래서 백남준에게 단군은 영웅이었다 그래서 백남준은 단군 스카타이 단군을 전자조각으로 작품화했다. 이런 사람이 나와 21세기 인류에게 희망을 주다. 고구려와 로마가 붙으면 고구려가 이긴다는 설이 있지만 한국역사를 보면 남의 영토에 대한 욕심이나 의지가 없다. 그렇게 평화와 공존 무엇보다 홍익인간을 이상적 인물로 삼았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과는 가치관 다르다. 더보기
[백남준] 서양미술의 위기 구한 비디오아트, 독일에서 잉태 독일인들은 백남준을 통해 뒤샹 이후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서양미술을 그 위기에서 구한 비디오아트가 독일에서 잉태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래 27살의 백남준, 그는 이 당시 지구상에 한번도 없었던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걸 태동시킨 시기였다. 비디오아트(물감 페인팅의 한계를 극복하는 전자 페인팅 E-painting 여기서부터 (뉴)미디어아트가 출발점이 된다)는 동서양미술사에서 유럽인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은 등가가치를 가진다 // 1959년 뒤셀도르프 22갤러리, 백남준의 전자아트 모색기, 비디오아트 태동기 백남준, , 갤러리 22, 뒤셀도르프 더보기
[백남준] 'TV와 함께 요강, 놋그릇으로 연주하는 (전자)굿' [영어판] Gut played with chamber pots and brassware, along with TV [1] Gut, the original experience of Nam June Paik's childhood Gut was the origin of all arts to Nam June Paik Gut seems to be related to childhood memories. Once a year, on the first lunar month of the lunar calendar, the family brought a shaman and held a Jaesu Gut' or a Gut for good luck of the family to help the family business. Each t.. 더보기
[백남준]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에서, 1974년 '인터넷' 창안 언급 뉴욕타임스(2006년 01월 31일) 또 다른 부고 기사 중 몇 문장 [1] 그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파악하고, 진통 끝에 탄생한 기술의 가능성을 간파하며 1974년 '전자초고속도로(인터넷)'라는 용어를 창안했다(He presciently coined the term "electronic superhighway" in 1974, grasping the essence of global communications and seeing the possibilities of technologies that were barely born) // [2] 백남준은 자신의 뉴욕 작업실(머서 스트리트)을 3개월 뒤처진 TV 수리점으로 비유했다 (He was a writer once compared his New .. 더보기
[백남준] 안은미, 추모굿 퍼포먼스 공중에 피아노 74대 뜨다 피아노가 등장한다. 이 피아노들인 포크레인을 타고 하늘에 올라간다. 하늘로 띄어 그 연결된 끈을 도끼로 잘라내면 아니면 가위로 그 끈을 자르면 피아노가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난다. 백남준 스타일이다. 이런 광기가 어디서 나왔다. 당시 모든 사람이 완전 미쳤다. 이영철 관장의 호연지기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 포퍼먼스에서 퍼포머는 누구인가? 한국에서 이걸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바로 무용가죠. 백남준아트센터(2009년) 앞에서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는 무시무시한 퍼포먼스도 있었죠 백남준상 시상식 날 이 세상의 모든 장벽과 편견과 아집과 경계를 없애는 정말 과격한 이날 포클레인은 물론이고 피아노만 해도 74대 동원 여기서는 피아노가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은 볼 수 없다... 더보기
[백남준] 유작 '엄마(Ommah)' 감상 - 오나경 작가 및 평론가 감상 포인트> 융합예술의 창시자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세계를 놀라게 하던 실험적 예술가이며 비디오아트의 창안자이다. 비평가나 전문가들은 그를 “20세기에 21세기를 산 희대의 선지자”, 또는 “비디오 아티스트라고만 정의하기엔 너무도 큰 예술가” “전무후무한 융합의 창시자”라고 지칭한다. 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뉴 미디어를 언제나 한 발 앞서 예술에 접목하던 동시대 미디어 예술의 선봉장이었으며 그의 예술적 행보는 그 자체로 세계 미술계의 거대한 유산이 되었다. 2005년 완성한 마지막 비디오 영상 설치작 ‘엄마(Ommah)’는 그의 49재 때 공개된 후, 미국 워싱턴국립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살구색 모시 두루마기 안에 설치된 TV화면에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 작품이 상영되고.. 더보기
[백남준] 텃세 심한 서구를 희롱한 희대의 '교란자' 아래 사진 뒤로 쾰른 성당이 보인다. 맑스가 젊어서 여기서 기자생활 했다. 백남준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의 언어는 황당무계함의 집합이다. 예컨대 "예술은 사기다" "애국하면 망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의 담긴 진실을 이해하기 힘들다. 어찌 되었든간에 그걸 밋밋하고 싱거운 순수예술보다 톡 쏘는 짜릿한 양념이 들어간 예술 선호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웠다면 백남준은 45년을 타지에서 버틸 수 없었다. 그가 세계주의자가 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다.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이 애국이라고 봤다.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 서구에서 희대의 교란자로 살아남았다. 미국작가 앨런 말리스는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난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 이기에 그와 예술적 자유를 놓고 견주려 한다면 큰 오산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 더보기
[백남준] 르네상스, '마르코 폴로'가 중국문명 서구에 전했기에 세계사를 몽골이 처음 만들다. Global 이라는 개념을 창조한 나라다. 몽골인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따위는 없다 - 백남준> 내 예술은 아무래도 한국의 관제문화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민중의 예술, 그중에서도 민중의 시간예술, 춤, 그리고 부족이랑 무당의 음악에 가까운 것 같다. // 내 스스로도 죽기 전에 몽골이라든가 티베트, 거기에 크리미아반도 부근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몽골이라고 하면 모두 바보같이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 몽골인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따위는 없다. // 무슨 말인가 하면, 르네상스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동양문화를 서구에 갖고 돌아간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가 어떻게 베니스에서부터 베이징까지 올 수 있었는가 // 하면 실크로드라는 긴 길을 칭기즈 칸이라든가 쿠.. 더보기
[백남준] 독일 가서 서양미술 대혼란에 빠지게 하다 "백남준은 선의 철학을 괴벽스럽게 때로는 농담 투로 전자아트에 적용하기로 유명하다" -하버드 대학교 시각 예술과 교수,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 // [평] 맞는 이야기다.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을 적용했다. // 음악을 미술로, 미술을 음악을 표현하다. // 즉 음악과 미술을 뒤섞은 비빔밥의 미학이다. 독일의 바그너가 이탈리아에서 독립적 미학을 만들면서 내놓은 총체예술(Gesamtkunstwerk) 즉 통합적 예술양식인가 더보기
[백남준] "내가 TV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괴츠 교수 덕분"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대화는 더 풍요로워진다.’ - 백남준 그의 불확정성(예술이란 사실 아무도 가보지 않고 시도하지 않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을 거는 것이다. 잘못 가면 죽을 수도 있고 길을 헤맬 수도 있다 백남준이 TV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엽기적이다 - 조가연 조선대학교 대학원 논문 중 일부 발췌 백남준에게 TV로 예술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사람은 바로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 1959년부터 1979년까지 뒤셀도르프 미대교수)'였다. 백남준은 “그가 그때 컴퓨터페인팅 얘기를 했어요.”라고 기억했다 // 백남준은 스쳐지나가듯 괴츠가 문제로 지적한 전자TV의 카오스적 상태를 존 케이지식의 리듬 구조로 수용했을지도 모른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괴츠.. 더보기
[백남준] 아버지 '장 피에르 빌헬름'와 영감 준 '칼 오토 괴츠' 백남준은 예술 분야에서 불확정주의를 탐색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방법을 발견했다. 예술분야에서 ‘불확정주의에 대한 탐색’은 존 케이지의 영향을 시사하고, ‘탐색 방법에 대한 발견’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시사한다. 존 케이지의 『과정으로서 작곡』과 칼 오토 괴츠의 ‘브라운관 실험’은 백남준의 음악적 사유에서 연결되었고, 새로운 예술형식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장 피에르 빌헬름은 “괴츠의 이론 체계와 케이지의 음악에서 백남준이 이끌어낸 결론”이라고 표현했다. 백남준은 전시 서문에서 가장 먼저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386) 장 피에르 빌헬름도 전시 서문에서 “17년의 기간 동안 괴츠가 구축한 이론 체계에 백남준은 아주 많은 것을 의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 더보기
[백남준] 이게 진짜 혁명, 1963년 그가 일으킨 미술 혁명 이게 진짜 혁명이다. 1963년 백남준이 일으킨 미술 혁명이다 // 전자 아트 '전자 붓' 개념이다. '물감 붓'과 '전자 붓' 차이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TV 모니터에 수직선과 수평선을 그리다 [쇤베르크-칸딘스키-백남준]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의 3개의 피아노 소품을 듣고 // 감동해 이렇게 말했다. // "쇤베르크는 우리에게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 들려주었다. // 이것이 바로 미래의 음악이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그야말로 불협화음의 극치를 이룬다. // 백남준은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전자화했다. // 그리고 현대미술에 추상적 불협화음 전자음악을 도입하다 더보기
[백남준] '괴츠'가 말한 '컴퓨터페인팅'이라는 말에 영감 받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가의 스승인 '칼 오토 괴츠(뒤셀도르프 미대에서 20년간 교수)' 103세까지 장수하였다 // 그의 화풍은 "빠르고, 탄력 있고, 역동적이고, 거의 춤추는 듯하게" 그는 백남준 TV아트에 스쳐가는 '컴퓨터 페인팅'이라는 말로 영감을 주다. "우리 화가들이 이 지구에 남기는 흔적은 빙하가 얼음 이동 중에 남기는 빙퇴석만큼 소중하지만(important),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insignifiant) 보일 수도 있다(„Die Spuren, die wir Maler auf dieser Erde hinterlassen, sind so wichtig und so unwichtig wie die Moränen, die ein Gletscher auf seiner eisigen Wanderung.. 더보기
[백남준] 참여TV, 작곡가-연주자-청중 동급(전시주인공=관객) [전시의 주인공은 관객이다 – 백남준 // 전위음악가로서 백남준은 작곡가와 연주자와 청중 동급으로 보면서 참여 TV를 발상하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발견한다. // 음악의 미래를 위해서는 음악의 형식을 개혁하는 일보단 // 음악의 존재론적 형식을 개혁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작곡가와 연주자와 달리 청중은 음악을 수동적으로 경험해 왔다. // 오랫동안 청중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 체화된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 음악의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함을 인식했다. // 작곡가, 연주자, 청중이라는 음악의 구성원의 참여 수준을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 민주적인 형태의 구조를 확립하고자 했다. // 작곡가의 위치에서 변화를 주도해야 했다. 작곡.. 더보기
[백남준] 단군시대 이후 멸종했던 '홍익인간' 다시 환생하다 스키타이 단군 시대 5천년 전 있었다가 멸종했던 '홍익인간(두루 넓게 주변 사람에 도움을 주는 인간형)이 한반도에 다시 환생하다. 그가 바로 백남준이다. 그는 문화 칭기즈칸으로 "내가 황색 재앙(yellow peril)이다"라고 선언하다. 이제 유럽과 미국은 다 죽었다. "그들과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라고 선포하다. 21세기 형 전자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돌아오다. 더보기
[백남준] 말하길, 18세기까지 '동양 3국', 유럽의 선진국 모델 18세기까지 동양 3국(한중일)은 유럽의 선진국 모델 - 일본, 한국,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을 후진국처럼 말하는 것은 완전히 미신으로, 18세기까지 유럽인은 동양을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도 중국을 선진국의 모델로서 글을 썼고, '몽테스키외'나 '아담 스미스'까지도 그렇게 썼다. 중요한 점은 중국에서 직물, 실크, 식기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며 유럽에서는 목기, 즉 나무로 만든 식기였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설거지가 잘 되지 않아서 병원균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줄줄이 죽었다. 중국이나 동양에 왜 인간이 많은가 하면 일찍부터 도자기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목기에 비해서 훨씬 깔끔하게 때를 닦아낼 수 있다. 페스트가 동양에서 그렇게 크게 유행하지 않은 것도 그.. 더보기
[백남준] 아트-과학 결함한 종합예술 - 옥스퍼드 캠프 교수 옥스퍼드 대학 마틴 켐프 교수 백남준의 과학과 예술의 종합판 원고 중 일부 이런 질문이 나온다. So can art be science and science can be art? 이 교수의 화두다. 심각한 교수들 이런 질문을 하지만 백남준에게는 예술과 과학의 경계란 전혀 없다. // 하여간 백남준은 세계미술계 존재 조차 희미한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보기
[백남준] 1984 Mr. 오웰 파리에서 총지휘, 서구인들 한국 전혀 몰라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생중계 파리 퐁피두센터 중계자 사령탑 앞에서 백남준이 총지휘를 하다. 당시 이를 본 한국인들 감격하다. 천호선 선생(문화 행정 공무원)과 김홍희 선생 등 이를 참관하다 천호선 김홍희 선생 부부가 그날 이 행사에 참가한 한국 방송 스텝(step)과 한국인들 식사에 초대해 위로하다 // 1984년 당시만 해도 서구인들 한국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 [1988년] 세계 올림픽으로 한국이 처음으로 지구촌에 데뷔하다 // 그리고 30년 후 [2018년 문재인 정권 당시] 한국은 50-30클럽 7개 국가 중 한 나라가 되었다 // 즉 인구 5천만명 이상, 국민소득 3만 달로 이상 대단한 성과다 //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은 나머지 6개 나라(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 더보기
[백남준] "비디오작업 끝나면 난 중국에 관한 놀라운 책 쓰겠다" [백남준] '장 폴 파르지에'에게 "비디오작업 끝나면 난 중국에 관한 놀랍도록 두꺼운 책 쓰겠다" 전했다는데 // 그런데 정말 썼나? // MIT 대학출판사에서 나온 후반부에 중국의 명언과 잠언 등을 영어로 번역한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 글 제목은 이라고 난 아직 못봤다. 백남준은 평생 서구보다 훨씬 수준 높은 지혜문서인 중국고전을 서양인에게 알리려 했다. 2016년 백남준 10주년 맞아 갤러리현대를 방문한 장 폴 파르지에(파리 8대학에서 20년간 백남준을 강의한 백남준 전문가 원래는 '고다르' 전공자 아래 사진 백남준 처음 만났을 때 사진과 후반기 사진) 인터뷰한 후 // 당신의 백남준 저서(1989년 발간 아래)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 프랑스로 귀국한 후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 그 책..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