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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비빔밥(소프트웨어)의 미학-포스트산업시대 예술 비빔밥(소프트웨어)의 미학-포스트산업시대의 예술(1995) -백남준 // 상당히 긴 문장인데 앞부분만 살짝 소개하다. // 과거에 파인아트로의 미술은 경제생활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파생물, 장식으로만 여겨졌다. 예를 들어, 품위 있는 아들이 미술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방탕한 사람 취급하며 집 밖으로 내쫓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파인아트로의 미술은 경제사회의 원동력으로서 경제적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왜 코페르니쿠스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걸까? / 21세기를 살아남기 위해 / 하드웨어 자본주의'에서 '소프트웨어 자본주의'로 전환을 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Aesthetics of Bibim-bab [a rice hash]-The Art of Post Industry Era (1995) In.. 더보기
[백남준] 영어로 번역한 중국 고사성어 왕자를 따라 외국에 인질로 가게 된 신하가 있었습니다. 출발하던 날 그는 왕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왕께서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시장 바닥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왕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뒤에 다른 사람이 달려와 똑같이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약간 의심이 들겠지." 왕이 대답했습니다. 신하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만약 그 뒤를 이어 세 번째 사람이 들어와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왕은 그렇다면 믿게 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신하는 자신이 왕자를 따라 외국으로 가게 되면 이런저런 말로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셋보다는 많을 텐데 그런 말들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것처럼 근거.. 더보기
[백남준] 초기 그의 급진적 아이디어, 지금 세계 표준 되다 [1] 백남준에게 스크린은 감시와 중독이 아니라 놀이, 연결, 고급스런 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국제적인 창조적 협력과 발견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계화-동기화된 미디어 작동을 예측했고 참 비전을 제시하다. [2] 이번 전시는 백남준이 얼마나 최첨단에 있었는지 인식하기 위해 약간의 문화적 회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그 당시 급진적인 것이 지금은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제 동시 방송, 엔터테인먼트와 정치의 결합, 공연과 논평, 영화의 아이디어 또는 TV는 어디에서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예술 형식이다. - 영국 가디언지 Nam June Paik review – encounters with a true visionary A teeming retrospective of the Korean-Am.. 더보기
[백남준] 스카타이 단군과 홍익인간 단군이 생각한 홍익인간 두루 많은 사람들(우리나라만 아니라 인류가 포함된다)에게 넓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되라 홍익인간의 이념을 정보시대에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20세기이 등장하다 바로 백남준이다. 그는 비디오아트로 위성아트도 인터넷 아트로 전 인류가 원활한 소통을 통해 전쟁을 막고 세계 평화와 공존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예술을 펼쳤다 그래서 백남준에게 단군은 영웅이었다 그래서 백남준은 단군 스카타이 단군을 전자조각으로 작품화했다. 이런 사람이 나와 21세기 인류에게 희망을 주다. 고구려와 로마가 붙으면 고구려가 이긴다는 설이 있지만 한국역사를 보면 남의 영토에 대한 욕심이나 의지가 없다. 그렇게 평화와 공존 무엇보다 홍익인간을 이상적 인물로 삼았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과는 가치관 다르다. 더보기
[백남준] 서양미술의 위기 구한 비디오아트, 독일에서 잉태 독일인들은 백남준을 통해 뒤샹 이후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서양미술을 그 위기에서 구한 비디오아트가 독일에서 잉태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래 27살의 백남준, 그는 이 당시 지구상에 한번도 없었던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걸 태동시킨 시기였다. 비디오아트(물감 페인팅의 한계를 극복하는 전자 페인팅 E-painting 여기서부터 (뉴)미디어아트가 출발점이 된다)는 동서양미술사에서 유럽인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은 등가가치를 가진다 // 1959년 뒤셀도르프 22갤러리, 백남준의 전자아트 모색기, 비디오아트 태동기 백남준, , 갤러리 22, 뒤셀도르프 더보기
[백남준] 'TV와 함께 요강, 놋그릇으로 연주하는 (전자)굿' [영어판] Gut played with chamber pots and brassware, along with TV [1] Gut, the original experience of Nam June Paik's childhood Gut was the origin of all arts to Nam June Paik Gut seems to be related to childhood memories. Once a year, on the first lunar month of the lunar calendar, the family brought a shaman and held a Jaesu Gut' or a Gut for good luck of the family to help the family business. Each t.. 더보기
[백남준]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에서, 1974년 '인터넷' 창안 언급 뉴욕타임스(2006년 01월 31일) 또 다른 부고 기사 중 몇 문장 [1] 그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파악하고, 진통 끝에 탄생한 기술의 가능성을 간파하며 1974년 '전자초고속도로(인터넷)'라는 용어를 창안했다(He presciently coined the term "electronic superhighway" in 1974, grasping the essence of global communications and seeing the possibilities of technologies that were barely born) // [2] 백남준은 자신의 뉴욕 작업실(머서 스트리트)을 3개월 뒤처진 TV 수리점으로 비유했다 (He was a writer once compared his New .. 더보기
[백남준] 안은미, 추모굿 퍼포먼스 공중에 피아노 74대 뜨다 피아노가 등장한다. 이 피아노들인 포크레인을 타고 하늘에 올라간다. 하늘로 띄어 그 연결된 끈을 도끼로 잘라내면 아니면 가위로 그 끈을 자르면 피아노가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난다. 백남준 스타일이다. 이런 광기가 어디서 나왔다. 당시 모든 사람이 완전 미쳤다. 이영철 관장의 호연지기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 포퍼먼스에서 퍼포머는 누구인가? 한국에서 이걸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바로 무용가죠. 백남준아트센터(2009년) 앞에서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는 무시무시한 퍼포먼스도 있었죠 백남준상 시상식 날 이 세상의 모든 장벽과 편견과 아집과 경계를 없애는 정말 과격한 이날 포클레인은 물론이고 피아노만 해도 74대 동원 여기서는 피아노가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은 볼 수 없다... 더보기
[백남준] 유작 '엄마(Ommah)' 감상 - 오나경 작가 및 평론가 감상 포인트> 융합예술의 창시자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세계를 놀라게 하던 실험적 예술가이며 비디오아트의 창안자이다. 비평가나 전문가들은 그를 “20세기에 21세기를 산 희대의 선지자”, 또는 “비디오 아티스트라고만 정의하기엔 너무도 큰 예술가” “전무후무한 융합의 창시자”라고 지칭한다. 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뉴 미디어를 언제나 한 발 앞서 예술에 접목하던 동시대 미디어 예술의 선봉장이었으며 그의 예술적 행보는 그 자체로 세계 미술계의 거대한 유산이 되었다. 2005년 완성한 마지막 비디오 영상 설치작 ‘엄마(Ommah)’는 그의 49재 때 공개된 후, 미국 워싱턴국립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살구색 모시 두루마기 안에 설치된 TV화면에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 작품이 상영되고.. 더보기
[백남준] 텃세 심한 서구를 희롱한 희대의 '교란자' 아래 사진 뒤로 쾰른 성당이 보인다. 맑스가 젊어서 여기서 기자생활 했다. 백남준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의 언어는 황당무계함의 집합이다. 예컨대 "예술은 사기다" "애국하면 망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의 담긴 진실을 이해하기 힘들다. 어찌 되었든간에 그걸 밋밋하고 싱거운 순수예술보다 톡 쏘는 짜릿한 양념이 들어간 예술 선호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웠다면 백남준은 45년을 타지에서 버틸 수 없었다. 그가 세계주의자가 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다.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이 애국이라고 봤다.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 서구에서 희대의 교란자로 살아남았다. 미국작가 앨런 말리스는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난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 이기에 그와 예술적 자유를 놓고 견주려 한다면 큰 오산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 더보기
[백남준] 르네상스, '마르코 폴로'가 중국문명 서구에 전했기에 내 예술은 아무래도 한국의 관제문화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민중의 예술, 그중에서도 민중의 시간예술, 춤, 그리고 부족이랑 무당의 음악에 가까운 것 같다. // 내 스스로도 죽기 전에 몽골이라든가 티베트, 거기에 크리미아반도 부근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 몽골이라고 하면 모두 바보같이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 몽골인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따위는 없다. // 무슨 말인가 하면, 르네상스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동양문화를 서구에 갖고 돌아간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 당시 그가 어떻게 베니스에서부터 베이징까지 올 수 있었는가 // 하면 실크로드라는 긴 길을 칭기즈 칸이라든가 쿠빌라이가 잘 지키고 있었던 때문이다. // 자주 몽골이 세계를 파괴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몽골 군대가 다시 실크로드를.. 더보기
[백남준] 독일 가서 서양미술 대혼란에 빠지게 하다 "백남준은 선의 철학을 괴벽스럽게 때로는 농담 투로 전자아트에 적용하기로 유명하다" -하버드 대학교 시각 예술과 교수,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 // [평] 맞는 이야기다.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을 적용했다. // 음악을 미술로, 미술을 음악을 표현하다. // 즉 음악과 미술을 뒤섞은 비빔밥의 미학이다. 독일의 바그너가 이탈리아에서 독립적 미학을 만들면서 내놓은 총체예술(Gesamtkunstwerk) 즉 통합적 예술양식인가 더보기
[백남준] "내가 TV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괴츠 교수 덕분"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대화는 더 풍요로워진다.’ - 백남준 그의 불확정성(예술이란 사실 아무도 가보지 않고 시도하지 않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을 거는 것이다. 잘못 가면 죽을 수도 있고 길을 헤맬 수도 있다 백남준이 TV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엽기적이다 - 조가연 조선대학교 대학원 논문 중 일부 발췌 백남준에게 TV로 예술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사람은 바로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 1959년부터 1979년까지 뒤셀도르프 미대교수)'였다. 백남준은 “그가 그때 컴퓨터페인팅 얘기를 했어요.”라고 기억했다 // 백남준은 스쳐지나가듯 괴츠가 문제로 지적한 전자TV의 카오스적 상태를 존 케이지식의 리듬 구조로 수용했을지도 모른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괴츠.. 더보기
[백남준] 아버지 '장 피에르 빌헬름'와 영감 준 '칼 오토 괴츠' 백남준은 예술 분야에서 불확정주의를 탐색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방법을 발견했다. 예술분야에서 ‘불확정주의에 대한 탐색’은 존 케이지의 영향을 시사하고, ‘탐색 방법에 대한 발견’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시사한다. 존 케이지의 『과정으로서 작곡』과 칼 오토 괴츠의 ‘브라운관 실험’은 백남준의 음악적 사유에서 연결되었고, 새로운 예술형식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장 피에르 빌헬름은 “괴츠의 이론 체계와 케이지의 음악에서 백남준이 이끌어낸 결론”이라고 표현했다. 백남준은 전시 서문에서 가장 먼저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386) 장 피에르 빌헬름도 전시 서문에서 “17년의 기간 동안 괴츠가 구축한 이론 체계에 백남준은 아주 많은 것을 의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 더보기
[백남준] 이게 진짜 혁명, 1963년 그가 일으킨 미술 혁명 이게 진짜 혁명이다. 1963년 백남준이 일으킨 미술 혁명이다 // 전자 아트 '전자 붓' 개념이다. '물감 붓'과 '전자 붓' 차이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TV 모니터에 수직선과 수평선을 그리다 [쇤베르크-칸딘스키-백남준]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의 3개의 피아노 소품을 듣고 // 감동해 이렇게 말했다. // "쇤베르크는 우리에게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 들려주었다. // 이것이 바로 미래의 음악이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그야말로 불협화음의 극치를 이룬다. // 백남준은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전자화했다. // 그리고 현대미술에 추상적 불협화음 전자음악을 도입하다 더보기
[백남준] '괴츠'가 말한 '컴퓨터페인팅'이라는 말에 영감 받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가의 스승인 '칼 오토 괴츠(뒤셀도르프 미대에서 20년간 교수)' 103세까지 장수하였다 // 그의 화풍은 "빠르고, 탄력 있고, 역동적이고, 거의 춤추는 듯하게" 그는 백남준 TV아트에 스쳐가는 '컴퓨터 페인팅'이라는 말로 영감을 주다. "우리 화가들이 이 지구에 남기는 흔적은 빙하가 얼음 이동 중에 남기는 빙퇴석만큼 소중하지만(important),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insignifiant) 보일 수도 있다(„Die Spuren, die wir Maler auf dieser Erde hinterlassen, sind so wichtig und so unwichtig wie die Moränen, die ein Gletscher auf seiner eisigen Wanderung.. 더보기
[백남준] 참여TV, 작곡가-연주자-청중 동급(전시주인공=관객) [전시의 주인공은 관객이다 – 백남준 // 전위음악가로서 백남준은 작곡가와 연주자와 청중 동급으로 보면서 참여 TV를 발상하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발견한다. // 음악의 미래를 위해서는 음악의 형식을 개혁하는 일보단 // 음악의 존재론적 형식을 개혁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작곡가와 연주자와 달리 청중은 음악을 수동적으로 경험해 왔다. // 오랫동안 청중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 체화된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 음악의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함을 인식했다. // 작곡가, 연주자, 청중이라는 음악의 구성원의 참여 수준을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 민주적인 형태의 구조를 확립하고자 했다. // 작곡가의 위치에서 변화를 주도해야 했다. 작곡.. 더보기
[백남준] 단군시대 이후 멸종했던 '홍익인간' 다시 환생하다 스키타이 단군 시대 5천년 전 있었다가 멸종했던 '홍익인간(두루 넓게 주변 사람에 도움을 주는 인간형)이 한반도에 다시 환생하다. 그가 바로 백남준이다. 그는 문화 칭기즈칸으로 "내가 황색 재앙(yellow peril)이다"라고 선언하다. 이제 유럽과 미국은 다 죽었다. "그들과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라고 선포하다. 21세기 형 전자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돌아오다. 더보기
[백남준] 말하길, 18세기까지 '동양 3국', 유럽의 선진국 모델 18세기까지 동양 3국(한중일)은 유럽의 선진국 모델 - 일본, 한국,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을 후진국처럼 말하는 것은 완전히 미신으로, 18세기까지 유럽인은 동양을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도 중국을 선진국의 모델로서 글을 썼고, '몽테스키외'나 '아담 스미스'까지도 그렇게 썼다. 중요한 점은 중국에서 직물, 실크, 식기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며 유럽에서는 목기, 즉 나무로 만든 식기였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설거지가 잘 되지 않아서 병원균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줄줄이 죽었다. 중국이나 동양에 왜 인간이 많은가 하면 일찍부터 도자기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목기에 비해서 훨씬 깔끔하게 때를 닦아낼 수 있다. 페스트가 동양에서 그렇게 크게 유행하지 않은 것도 그.. 더보기
[백남준] 아트-과학 결함한 종합예술 - 옥스퍼드 캠프 교수 옥스퍼드 대학 마틴 켐프 교수 백남준의 과학과 예술의 종합판 원고 중 일부 이런 질문이 나온다. So can art be science and science can be art? 이 교수의 화두다. 심각한 교수들 이런 질문을 하지만 백남준에게는 예술과 과학의 경계란 전혀 없다. // 하여간 백남준은 세계미술계 존재 조차 희미한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보기
[백남준] 1984 Mr. 오웰 파리에서 총지휘, 서구인들 한국 전혀 몰라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생중계 파리 퐁피두센터 중계자 사령탑 앞에서 백남준이 총지휘를 하다. 당시 이를 본 한국인들 감격하다. 천호선 선생(문화 행정 공무원)과 김홍희 선생 등 이를 참관하다 천호선 김홍희 선생 부부가 그날 이 행사에 참가한 한국 방송 스텝(step)과 한국인들 식사에 초대해 위로하다 // 1984년 당시만 해도 서구인들 한국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 [1988년] 세계 올림픽으로 한국이 처음으로 지구촌에 데뷔하다 // 그리고 30년 후 [2018년 문재인 정권 당시] 한국은 50-30클럽 7개 국가 중 한 나라가 되었다 // 즉 인구 5천만명 이상, 국민소득 3만 달로 이상 대단한 성과다 //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은 나머지 6개 나라(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 더보기
[백남준] "비디오작업 끝나면 난 중국에 관한 놀라운 책 쓰겠다" [백남준] '장 폴 파르지에'에게 "비디오작업 끝나면 난 중국에 관한 놀랍도록 두꺼운 책 쓰겠다" 전했다는데 // 그런데 정말 썼나? // MIT 대학출판사에서 나온 후반부에 중국의 명언과 잠언 등을 영어로 번역한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 글 제목은 이라고 난 아직 못봤다. 백남준은 평생 서구보다 훨씬 수준 높은 지혜문서인 중국고전을 서양인에게 알리려 했다. 2016년 백남준 10주년 맞아 갤러리현대를 방문한 장 폴 파르지에(파리 8대학에서 20년간 백남준을 강의한 백남준 전문가 원래는 '고다르' 전공자 아래 사진 백남준 처음 만났을 때 사진과 후반기 사진) 인터뷰한 후 // 당신의 백남준 저서(1989년 발간 아래)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 프랑스로 귀국한 후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 그 책.. 더보기
[백남준] 1989년 퐁피두센터 홍라희 여사, 박명자 회장 백남준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프랑스 미테랑 정부로 부터 작품 의뢰를 받고 프랑스 측 큐레이터와 작업을 하면서 찍은 사진(1989.5.27)이다 큐레이터 수잔 파제(Suzanne Pagé, 현재 파리 루이 뷔통 창조 재단의 예술 감독)와 가운데 세계적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 1960년대 프랑스 누보레알리즘의 창시자)가 보인다 [1] 1989년(프랑스 혁명 200주년) 백남준, 홍라희 여사, 박명자 회장, 원화랑의 정기용대표등이 파리 시립미술관 에서 열리는 백남준 전시 관람 [2]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한 당시 한국의 경제는 단군 이래 최고의 호경기였다. 내가 1989년(프랑스혁명 200주년) 8월 파리에 갔을 때 한국돈 가치가 정말 높았다. 돈을 쓸만 했다. 위사.. 더보기
[백남준]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드로잉 심플하다 // 백남준 드로잉(작품 구상) 정말 심플하다. 백남준 왈 "[...]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맑시스트 소설가)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 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작품구상 중 하나였다 더보기
[백남준] 1995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서 다움(Daum) 발동 다움(Daum)이 1995년 백남준이 광주비엔날레에서 기획한 특별전 에서 처음 나왔다고 백남준은 당시 미디어아트의 세계적 권위자 미국 출신 '굿맨'을 큐레이터로 초청했다 그리고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한국 측 큐레이터로 지명했다. 백남준은 지식보다 정보를 더 중시하다. 자신을 '정보 아티스트'라고 했다. 1995년 한국에서 처음 광주비엔날레가 열렸을 때 특별전으로 정보 아트(Info Art)전을 열었다. 백남준은 "한국은 다 좋은데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고 늘 말했다. 우리가 이 말을 항상 되새겨야 할 것 같다. 큐레이팅 김홍희(전 시립관장), 신시아 굿맨(아래 사진) 백남준은 신시아 굿맨 같은 세계적 정보(전자)아트 전문가를 광주비엔날레에 초대해, 우리로 하여금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데 .. 더보기
[공자와 백남준] 정치와 예술을 음악으로 풀다 두 사람은 정치와 예술을 음악(결국 평화)으로 풀려했다 1) 백남준 미술(총체예술)을 결국 음악으로 풀려 했다 미술도 음악(성)으로 풀 때 진정한 미술이 된다. // 백남준의 발상이 아닌가 싶다. // 물론 이런 갈 직접 언급으 하지는 않았지만... // 사실 이것은 칸딘스키기 먼저 발상하고 그런 미술을 실천했다. // 그래서 음악적 요소가 많은 추상 미술이 탄생한 것이다. // 칸딘스키와 백남준은 음악적 미술을 했다는 면에서 서로 통한다. 2) 공자는 정치를 결국 음악으로 풀려 했다. 정치를 통치가 아니라 음악(율려)이 세상을 다스릴 때 지상에 평화와 공존의 세상이 온다. 공자의 사상과 유사하다> // "율려가 무엇인가? 율려가 무엇이관데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인가? //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정.. 더보기
[백남준] 그의 마지막 꿈, 서울 한강에서 뉴욕 맨해튼까지 서울에서 날마다 뉴욕 맨해튼 거리를 볼 수 있는 백남준 메가트론 작품(서울에서 뉴욕까지, 40인치 TV 150대)이 마포 한강공원에 설치되었다면 미국을 가지 않고도 생방송으로 매일 뉴욕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백남준의 마지막 꿈은 서울 한강(마포 여의도)에서 미국 맨해튼을 보고 미국 맨하튼에서 서울 한강(마포 여의도)을 보는 메가트론을 만든 것이었다 - 백남준 전자 테크니션 이정성 더보기
[백남준] 샤머니즘보다 더 이상적 유토피아는 없다 한국출신 백남준에게 샤머니즘보다 더 이상적인 유토피아는 없다. // 샤머니즘의 꽃인 '굿'은 영어로 GOOD이다. // 좋은 세상(해원상생 혹은 정음정양)을 만들자는 것이다. // 박경리가 "한국 예술의 뿌리가 샤머니즘이다"라고 말한 이유다. // 백남준 예술의 근간이 궁극적으로 샤머니즘에서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 백남준의 샤머니즘은 스키타이 북방 아시아 몽골이나 시베리아 우랄 알타이뿐만 아니라 // 북미 인디언과 멕시코와 페루의 샤머니즘도 다 포함한다. // 샤머니즘이 무엇보다 좋은 것은 무정부주의적이기 때문이다. // 개인이 절대로 조직이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 독재가 불가능하다. // 그런데 요즘 한국이 신자유주의로 정신 건강이 최악이라 // 권력과 손 잡은 사이비 샤머니즘이 횡행.. 더보기
[백남준] '네트워크-디지털'로 더 평등한 인류애 추구 [테이트모던 백남준 전시 도록 중] 국경이나 문화적 경계나 위계 없이 서로 얽혀 있는 세상에 대한 그의 비전은 점점 더 네트워크화(수직적 혹은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보다 평등한 관계로)되고 디지털로 연결되는 오늘날의 현실과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매우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 // 백남준은 '문화를 민족주의(애국주의나 파시즘)에서 벗어나게 하고, 허영과 속물근성(스노비즘)에서 벗어나 소통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 His vision of a world intertwined without national borders or cultural hierarchies resonates strongly with our increasingly networked and digi.. 더보기
[백남준] 우리는 결코 단일민족 아니다 박정희는 우리는 단일민족이라고 강조했지만 그건 독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몽골대제국 시대에 고려 왕조의 딸들과 몽골귀족들 결혼정책을 썼기에 피가 많이 섞여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신라의 왕족은 스키타이(흉노) 족에서 온 것이다 신라 문무왕 비에 자신의 조상을 적으면서 스키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훈족(흉노족)임을 확실히 문자화-기록화했다 // 단일민족 이데올로기가 왜 나쁜가? (타 민족 혐오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이 좋아한다. 단일민족을 강조한 지도자 중 히틀러만한 이가 또 있을까? // 히틀러는 수백만 유대인을 대학살하다. // 백남준이 애국주의를 그렇게 증오한 이유다. // 백남준은 항상 자신이 몽골족 후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더보기